사진=뉴시스 제공.
사진=뉴시스 제공.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도 이루지 못한 꿈이 있었습니다.

시대의 풍운아 진시황(秦始皇)이 살았던 삶의 궤적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아서 몇 자 적어봅니다.

불로장생(不老長生)은 모든 인류의 꿈입니다.

진시황은 여러 제후국을 거대한 하나의 나라로 통일시킨 최초의 황제였지만 그의 삶은 태어날 때부터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진시황의 법적(法的)인 아버지는 자초(子楚)였는데 자초는 조(趙)나라에 인질로 잡혀있던 중 그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 여불위(呂不韋)라는 거상(巨商)과 친밀한 사이가 됩니다.

자초가 초대를 받아 여불위의 집으로 가서 융숭한 대접을 받던 중에 여불위의 애첩이었던 조희(趙姬)를 보고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해버립니다.

자신의 계략이 맞아들어간다고 생각한 여불위는 쾌재를 부릅니다.

이를 눈치챈 여불위는 자초에게 조희를 바치겠다고 합니다.

그 당시 조희는 이미 여불위의 아이를 잉태하고 있었는데 울면서 자초에게 가지않겠다고 발버둥치는 조희를 여불위는 이렇게 달랩니다.

"예로부터 농사를 지으면 10배의 이익이 남고, 시장에 가서 장사를 하면 100배가 남는다. 

그러나 자식을 잘 키우면 1000 배의 이윤을 챙길 수 있는데 반해 정권을 잡으면 1만 배 장사를 할 수 있다"고 하면서 조희를 설득하여 자초에게 갈 것을 권합니다.

이렇게 해서 자초의 품으로 간 조희는 9달 후에 훗날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을 낳게 됩니다.

진시황의 이름은 자초의 성을 따서 영정(霙政)으로 지었습니다.

정이 3살 되던 해에 자초는 여불위의 도움으로 진나라로 귀국합니다.

조희와 아들 정은 조나라에 그대로 남아있다가 정이 9살 되던 해에 진나라로 가게 됩니다.

정의 법적인 아버지 자초는 진나라로 귀국한지 7년 만에 진나라의 왕으로 즉위합니다.

그가 장양왕(將養王)입니다.

그런데 장양왕은 즉위한지 불과 3년 만에 사망하고, 왕자였던 정이 13살의 어린 나이에 왕이 됩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고보니 자연스레 여불위의 권세는 하늘을 찌를 정도가 되었습니다.

장양왕 때 승상(丞相:우리나라의 정승과 같음)을 지내고 정(政)이 즉위한 후에는 어린 왕을 대신하여 상국(相國:영의정, 우의정, 좌의정의 총칭)으로서 명실공히 한 나라의 실권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는 가운데 진시황이 22살이 되었고, 성인식을 치른 후부터 본격적으로 정치일선에 나서게 되지요.

자신을 낳아준 친모였던 조희는 장양왕이 죽은 후 여불위와 통정(通情)을 계속하다가 여러 상황을 판단하여 여불위가 노애(嫪毐)라는 건달을 환관(宦官:거세된 남자로서 궁중의 잡무를 처리하던 사람)으로 위장해서 궁중에 들여보내 자신을 대신하여 조희의 욕정을 채워주게 합니다.

여불위가 황태후(皇太后:황제의 어머니)였던 조희와의 궁중밀애가 소문이 나자 여불위 스스로 발을 뺀 것이었습니다. 

황태후는 아들인 시황제와 주변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궁궐이 있는 함양에서 200리 떨어진 옹주성(雍州城)으로 거처를 옮기게 됩니다.

이렇게 되다보니 조희와 노애는 노골적으로 정욕을 불태우게 되었고, 그들 사이에서 두 사내 아이까지 연년생으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조희와 노애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자신들의 핏줄에게 정권을 잡게 하고싶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를 진압한 진시황은 씨가 다른 두 동생을 포대기에 담아 길바닥에 패대기를 쳐서 죽이고, 노애는 거열형(車裂刑:사지를 말이 끄는 수레에 묶어 찢어죽이는 극형)을 시켰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모인 조희는 살려두었지만 생부였던 여불위는 한통의 글을 내려서 자살을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기원 전 238년에 발생한 이 사건을 "노애의 난(亂)"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주변을 정리하고 권력기반을 다진 진시황은 조나라, 한나라, 위나라, 초나라, 연나라, 제나라를 차례로 무너뜨리고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게 되었습니다.

진시황은 재임기간 중 만리장성을 축조하고, 남쪽의 양자강과 북쪽의 황하를 잇는 대운하를 건설하였으며 아방궁도 세웠습니다.

자신이 죽은 후에 자신을 지킬 거대한 병마용 무덤을 만들었고, 화폐와 도량형을 통일하고 도로를 개설함으로써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진시황은 강력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절대군주체제를 확립함과 동시에 황후를 두지않은 채 방탕한 생활을 했던 황제이기도 했습니다.

미녀군단 1만 명을 궁중에 두고 주색에 빠져 생활하던 진시황은 나이가 들면서 차츰 불로장생을 꿈꾸었습니다.

서복(徐福) 장군에게 3000명의 동남동녀(童男童女)와 금은보화를 실어서 동방으로 불로초를 구하러 보낸 것도 오래 살고싶은 욕망 때문이었습니다.

서복 장군은 우리나라 남해의 금산 부근에까지 왔다가 간 흔적을 남겼고, 이후 제주도로 건너가서 한라산을 돌아본 뒤 서귀포에서 일본으로 간 것으로 추측되지만 그 후의 소식은 기록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서귀포(西歸浦)라는 지명은 서복 장군이 돌아간 항구라는 뜻이라고 전설로 전해지는데, 사실 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진시황은 13살에 왕위에 올랐고, 37세 때에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 하였습니다.

진시황은 재임기간 중 세 번이나 암살의 위기를 모면해야 했습니다.

말년의 진시황은 스트레스와 강박관념 등으로 정신분열증을 앓았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분서갱유(焚書坑儒:책을 불태우고, 선비를 구덩이에 묻어서 죽임)를 저지르고 아방궁과 병마용총(兵馬用塚)을 건설할 때 동원된 인부들을 일만 실컷 부려먹고 70만 명이나 죽인 사실은 진시황의 정신이 온전하지 못했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던 진시황은 그의 나이 49세 때 지방을 순시하던 중 불로불사의 꿈을 접은 채 마차 위에서 숨을 거둡니다.

당시 수행하던 승상 이사(李斯)는 수도 함양(咸陽)에서 내란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하여 진시황의 사망 소식을 숨기고 조고와 호해(胡亥:진시황의 둘째 아들로서 진시황을 이어 황제가 됨) 등과 공모하여 황제로 즉위할 공자였던 장남 부소에게 보내는 친서를 위조하여 부소를 자살토록 유도합니다.

진시황이 죽을 당시 음력 7월은 찌는 듯한 더위로 인해 시신에서 역겨운 냄새가 나자 소금에 절인 생선을 진시황이 탄 수레에 실어서 냄새를 위장하였고, 매 끼마다 식사까지도 차려서 바치도록 함으로써 수행원들조차 진시황의 사망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고 전해집니다.

진시황의 시신을 함양으로 이송시킨 후 9월에야 매장을 하였는데 진시황이 묻힌 장소는 2200여 년 동안 베일에 쌓여있다가 1974년 한 농민이 우물을 파던 도중에 우연히 발견하였답니다.

진시황이 죽은 후 그의 아들인 호해(胡亥)가 2대 황제로 즉위하였지만 호해는 불과 3년 만에 유방(劉邦) 에게 패함으로써 나라의 문을 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지 15년, 그가 죽은 3년 후의 일이었습니다.

진시황의 사인(死因)은 염증이 심해 수은을 과량 섭취하고, 몸에 도포(塗布) 함으로써 수은중독으로 사망했을 것이라는 설(說)도 있지만 서복 장군이 불로장생의 영약으로 <해죽순>만 구해서 가져갔더라도 진시황은 더 오래 살았을 것이고, 진(秦)나라가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부질없는 생각으로 또 새벽을 깨웁니다.

해죽순은 최고의 항산화물질로 일컬어지는 폴리페놀을 지구 상에서 가장 많이 함유한 식품입니다.

천하를 품었어도 건강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배대열 칼럼니스트 BDYTYY@nv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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