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기식 한중도시우호협회장
권기식 한중도시우호협회장

미군이 철수를 시작한 지 3개월 만에 아프가니스탄이 다시 탈레반의 손에 넘어갔다. 대통령은 정부를 버리고 도망가고 수십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1975년 4월 30일 '사이공 함락'이 재현된 것이다.

지난 15일 압둘 사타르 미르자크왈 아프가니스탄 내무부 장관은 "과도정부에 평화적으로 정권을 이양할 것"이라고 밝혔다.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은 이날 사의를 표명한 뒤 곧바로 아프간을 떠났다. 미군에 부역했거나 정부에 몸담았던 수십만 명이 갑작스러운 사태에 놀라 우왕좌왕하고 있다. 은행은 인출사태가 벌어지고, 국제공항은 카불을 떠나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각국 대사관들도 비상 탈출에 급급한 모습이다. 그야말로 1975년 '사이공 최후의 날'을 다시 보는 듯하다.

지난 4월 29일 미군이 철수를 시작할 때만 해도 탈레반의 카불 진격은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됐다. 미군 정보당국은 탈레반의 카불 진격까지는 최소 6개월에서 1년이 걸릴 것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탈레반은 별다른 전투를 치르지 않고 빠르게 카불까지 진격했다. 미군 철수 이후 각 지방의 정부군이 싸움을 포기한 채 탈레반에 항복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탈레반은 지난 2001년 9.11 테러의 배후인 오사마 빈 라덴을 넘기라는 미국의 요구에 불응해 침공을 받아 정권을 빼앗긴 이후 20년 만에 다시 아프가니스탄의 주인이 되었다.

미국은 예상보다 빠른 탈레반의 진격과 아프가니스탄 정권의 붕괴에 당황하고 있다. 미국은 지난 20년간 아프간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미군 2448명이 전사했다. 또 나토(NATO) 및 기타 동맹국 군인 1144명, 아프간 민간인 4만 7000여 명, 아프간 군인과 경찰 6만 6000여 명이 희생됐다.

군비 또한 천문학적인 수준으로 들어갔다. 지난 20년간 총 군비는 1조 달러(1155조 원)가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아프간 정부군에 대한 지원에만 매년 수십억 달러가 들어갔다.

미국이 천문학적인 군비와 엄청난 군사력에도 아프간에서 패퇴한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요인은 아프간 정부의 무능과 부패이다. 아프간 정부는 미국의 지원금을 빼돌려 개인의 곳간으로 옮기는 데 혈안이 되어 전투와 민생 관리는 안중에 없었다. 정부군 숫자가 30만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5만여 명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돈을 빼돌리기 위해 장부에만 있는 '유령군인'이었던 것이다. 정치인과 정부 관료, 군부 지도자들이 미국의 지원금과 물자를 빼돌리는 데 혈안이 되었으니 탈레반과의 전투가 제대로 이뤄질 리 없다.

두 번째는 아프간의 지형적 특징이다. 국토 대부분이 산악지형이라 군사작전이 힘들고 게릴라전이 용이하다는 점이다.

셋째는 탈레반의 전투능력이다. 핵심 전투원이 6만~7만 5000여 명으로 추산되는 탈레반은 일반 민간인 복장으로 전투를 치르기 때문에 도심 전투에서 민간인과의 구분이 힘들다. 또한 정부군 내 탈레반 동조자들이 제공하는 작전정보를 바탕으로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어왔다.

결국 미국은 무능한 정권을 지탱하느라 수천 명의 미군을 잃고 천문학적인 군비를 쏟아부었다. 이런 미국의 군사 외교적 패착에 대해 미국 내에서도 자성이 제기되고 있다. 민주당은 "아프간 정부군의 급속한 붕괴는 2400여 명의 군인이 사망하고 엄청난 돈이 들었던 지난 20년이 얼마나 무익했는지 보여준다"고 밝혔다.

이번 아프간 사태는 미국 패권주의의 좌절이자 패배이다. 사이공 함락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미국이 외교적 전략을 버리고 군사적 전략으로 주권국가를 침공한 결과는 소모적인 전쟁과 막대한 인명ㆍ재산의 피해로 귀결됐다. 미국은 자국의 국가이익을 위해 다른 나라의 주권을 침해하는 패권적 행태에 대해 자성해야 한다.

권기식 한중도시우호협회장

* 필자 소개= 한겨레신문 기자와 청와대 정치국장을 거쳐 영남매일신문 회장과 2018평창동계올림픽 민간단체협의회장 등을 역임했다. 한양대 국제대학원 교수와 일본 외무성 초청 시즈오카현립대 초빙교수, 중국 외교부 초청 칭화대 방문학자로 활동했다. 서울미디어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와 2021 미스월드ㆍ유니버스코리아조직위원회 국제조직위원장, 국기원 자문위원 등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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