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시멘트산업의 살아있는 역사] 남기동 회고록(60) 오일쇼크보다 쇼킹한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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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시멘트산업의 살아있는 역사] 남기동 회고록(60) 오일쇼크보다 쇼킹한 기술
  • 남기동
  • 승인 2019.06.2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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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비전e] 쌍용에서 16년 동안 일하다가 1978년 동양시멘트로 자리를 옮겼다. 동양시멘트는 1957년 강원도 삼척에 있던 오노다 시멘트공장을 정부로부터 불하받아 설립되었다.

삼척공장은 공장을 짓다가 일본이 패망하고 그대로 두고 간 것을 이양구(李洋球) 회장이 공사를 마무리해 연산 8만 톤으로 시작한 대한민국 최초의 시멘트공장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있다.

서남(瑞南) 이양구 회장은 함경도 출신으로 1942년 함흥식량영단에 근무했으며 1947년 월남해 과자판매로 동양식량공사를 설립하고 설탕과 밀가루 등의 전국적인 판매망을 구축했다.

1951년 삼양물산공사를 설립해 설탕, 소맥분을 수입해 판매하던 중 1952년 국제시장 화재로 공장이 전소되었으나 이후 설탕사업이 번창했다. 1955년 이병철, 배동환과 동업으로 동양제당주식회사를 설립하고 풍국제과 경영에도 참여해 오리온그룹(옛 동양제과)의 기틀을 다졌다.

1957년 삼척시멘트공장을 인수하면서 시멘트사업에 진출한 뒤 6차례의 증설을 통해 단일 공장으로는 국내 최대 생산량을 자랑하는 삼척공장을 일구어냈다. 1987년 은탑산업훈장을 수훈하고 영면 후 국민훈장 모란장이 추서되었다.

동양시멘트는 내가 합류하기 전에도 이미 큰 회사였다. 1967년 연산 300만 톤 규모로 국내 최대 시멘트 메이커로 부상한 뒤 1975년 증설로 연산 400만 톤 규모로 꾸준하게 성장해오고 있었다.

내가 동양에 몸담고 있으면서 가장 보람이 있었던 일은 1981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시멘트 생산 연료를 벙커씨유에서 유연탄으로 대체한 것이다.

1979년 제2차 오일쇼크로 유가가 천정부지로 치솟기 시작했다. 중동전 이후 아랍 산유국들이 석유를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하면서 석유값이 다시 급등한 것이다. 3~5달러였던 유가가 2차 파동 때는 30달러까지 올라갔다. 산업계 전체가 망할 위기에 직면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1962년까지만 해도 에너지 소비량 중 석유의 비중이 9.8퍼센트에 불과했지만 경제개발계획에 따른 고도성장으로 1975년 56.9퍼센트, 1978년 63.5퍼센트까지 높아지고 있었다. 1년 수출액의 4분의 1을 석유를 사는 데 써버리는 셈이었다.

시멘트업계는 공황에 빠졌다. 시멘트는 돌가루를 빻아 굽는데, 굽는 연료가 석유였다. 연료가 많이 소비되는 사업이어서 석유파동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죽느냐 사느냐”의 긴장감이 팽배해 있는 가운데 정부와 업계는 살아남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녀야 했다. 동양시멘트 부사장이던 나는 고민에 빠졌다.

‘연료를 바꾸자! 기름 대신 석탄을 쓰자’

시멘트 굽는 연료를 벙커씨유에서 석탄으로 바꾸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당시 국내에서 흔하디 흔한 석탄은 전량 수입하는 석유의 3분의 1 가격이었다. 유연탄을 가루로 만들어 섞고 열을 가해 1,350도 이상 올려야 했다. 이탄, 아탄, 갈탄, 역청탄 같은 유연탄은 휘발분을 다량 함유하고 있어 화염을 내며 탄다.

공장에서 먹고 자며 연구에 매달린 끝에 석탄을 에너지원으로 한 시멘트 제조공정 개발에 성공했다. 석탄 분말이 폭발하지 않도록 아주 고운 분말로 만들어 분사시켜 기름처럼 때게 하는 획기적인 기술이었다. 시멘트 소성용 연료를 벙커씨유에서 유연탄(80퍼센트)과 벙커씨유(20퍼센트)를 혼합해 사용하는 연료대체에 성공했다. 이는 시멘트산업 사상 최초의 성과다.

동양시멘트는 공장에서는 벙커씨유를 유연탄으로 대체함으로써 연간 25만 킬로리터의 벙커씨유를 절감할 수 있었다. 자그마치 3,500만 달러의 외화를 절약한 셈이었다. 이 공적으로 나는 1981년 ‘3・1문화상(기술상)’을 받기도 했다. 획기적인 기술이 개발되자 회사 안에서는 당연히 특허를 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보안을 유지해야 합니다. 경쟁사들은 유연탄보다 5배 가격이 더 나가는 기름을 때고 있습니다. 우리가 훨씬 앞서 갈 수 있으니 경쟁사들이 따라하지 못하도록 서둘러 특허를 내야 합니다.”

나는 반대했다.

“이런 기술은 나누어야 합니다. 기술 공유를 통해 원가를 낮추는 것이 시멘트업계를 위해 좋은 것 아니오? 우리나라 모든 시멘트회사들이 석유에서 유연탄으로 연료를 대체하도록 해야 합니다. 독점하면 처음엔 독주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중에 업계 전체가 어려워지면 결국 공멸하고 말 겁니다. 기술은 나누어야 그 가치가 극대화하는 겁니다.”

동양시멘트 직원 대상 강연

나는 특허를 내는 대신 동양시멘트 제천공장에 모든 시멘트공장 사람들을 모이게 했다. 그리고 기술세미나를 열었다. 결국 우리나라 시멘트 업체들이 싼값에 시멘트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으니 잘 된 일이다.

매년 심포지엄을 열어 시멘트기술을 공유하는 것이 국가 기술 발전에 기여한다고 믿었다. 전국에 있는 시멘트 기술자들은 현장 근무하는 사람 빼놓고 다 왔다. 그 동안 개발한 것을 발표하고 또 다른 곳에서 개발한 것을 듣고 서로 토론하며 가르쳐주고 배우는 장이 되었다.

한편으로는 단결의 장도 되었다. 한번은 큰 수해가 났는데 이웃 공장에 있는 기술자들이 자기 연장을 가지고 뛰어와 고쳐주었다. 요즘 그런 일을 했다가는 야단이 났을 것이다. 1981년 연료 대체에 성공하면서 동양시멘트만 해도 연간 3,500만 달러를 절약하게 되고, 기술 공유로 업계 전체가 엄청난 효과를 거두었다. 업계에서는 나의 흉상을 금으로 만들자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나는 시멘트공장 확장에 열중하며 고희를 맞을 때까지 동분서주했다. 동양에 있는 동안 여러 가지 신기술을 적용했다. 시멘트 분야에서만큼은 세계 최고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1985년 삼척공장의 반건식 공장을 최신식 NSP공정으로 대체하는 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도 했다. 그 결과 생산량 증대와 시멘트 품질 향상은 물론 공해가 적은 환경을 조성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제조공정을 자동화하는 한편, 혼합시스템과 집진시스템 첨단화 등도 추진했다.

◆ 남기동 선생은...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100살이다. 일본 제6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신생 이공학부 응용화학과에 편입했다. 1946년 중앙공업연구소 지질광물연구소장, 요업 과장으로 근무하며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 등에도 출강했다. 부산 피난 중에도 연구하며 공학도들을 가르쳤다. 6·25 후 운크라 건설위원장을 맡아 1957년 연산 20만 톤 규모의 문경시멘트공장을 건설했다. 화학과장, 공업국 기감(技監)으로 인천판유리공장, 충주비료공장 등 공장 건설 및 복구사업을 추진했다. 1960년 국내 대학 최초로 한양대에 요업공학과를 창설하고 학과장을 맡았다. 1962년 쌍용양회로 옮겨 서독 훔볼트의 신기술 ‘SP킬른(Kiln)’ 방식으로 1964년 연산 40만 톤 규모의 영월공장을 준공했는데, 최단 공사기간을 기록해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영월공장 준공으로 우리나라는 시멘트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1968년 건설한 동해공장은 단위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공장 증설을 거듭해 1992년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량은 세계 5위가 되었다. 1978년 동양시멘트로 자리를 옮겨 2차 오일쇼크 때 시멘트 생산 연료를 벙커씨유에서 유연탄으로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 특허 대신 공개를 택해 업계를 위기에서 살려냈다. 이 공적으로 1981년 '3·1 문화상(기술상)'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 요청으로 1992년 인도네시아 최초의 시멘트공장인 '시비뇽 시멘트플랜트(P.T. SEMEN CIBINONG)'를 건설했다. 한국요업(세라믹) 학회, 한국화학공학회, 대한화학회등 3개 학회, 대한요업총협회(지금의 한국세라믹총협회) 회장으로 학계와 산업계의 유대를 다졌다. 학교, 연구소, 산업체가 참석하는 '시멘트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를 조직해 학술교류는 물론 민간교류에도 힘썼다. 세라믹학회는 그의 호를 따 장학지원 프로그램인 '양송 상'을 제정했다. 1993년 인하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2006년 서울대 설립 60돌 기념 '한국을 일으킨 60인' 상, 2007년 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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