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비전e] 1990년 동양시멘트 사장을 그만두고 좀 쉬려는데 인도네시아에서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이 사람을 보내 만나자고 했다. 수도 자카르타에 있는 대통령궁에서 환대를 받았다.

수하르토 대통령은 수카르노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집권했다. 그 역시 육군총사령관 출신으로 장기집권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인도네시아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무척이나 힘쓴 지도자였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간곡하게 부탁했다.

“인도네시아 경제를 일으키려면 엄청난 양의 시멘트가 필요한데 한국을 비롯해 각국으로부터 시멘트를 수입하는 돈이 너무 많이 듭니다. 인도네시아에는 석유도 나오고 석회석도 풍부합니다. 한국은 30년 전에 시멘트공장을 지어 지금 시멘트강국이 되었는데 그 주역이 바로 남 선생님이라고 들었습니다. 우리 인도네시아에도 시멘트공장을 지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인도네시아는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1945년 8월 독립했다. 장장 350년간 네덜란드의 통치를 받았었다. 자체 시멘트공장이 없어 국가재건사업에 필수적인 시멘트를 전량 수입에 의존해야 했다. 특히 한국에서 많은 양을 수입하고 있었다.

시멘트 수입으로 막대한 외자가 빠져나가는 것도 문제였지만 먼 나라에서 시멘트를 들여오다 보니 해운료가 원가보다 많을 지경이었고, 늦게 도착한 시멘트의 변질이 심했다. 그래서 정부 차원에서 시멘트공장 건설을 계획하고 나에게 그것을 추진해 달라고 의뢰해 온 것이다.

순간 나는 30년 전 한국을 보는 듯했다. 우리도 폐허 위에서 시멘트공장 하나 없이 원조를 받던 신세였다. 동병상련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때 시멘트공장을 지어 자급자족하겠다고 도전한 것이 얼마나 잘한 것인지 새삼 절감했다.

저개발국과 개발도상국의 처지를 겪은 나는 수하르토 대통령의 청을 흔쾌히 수락했다. 당시 나는 일흔을 넘긴 나이였지만 체력도 열정도 30년 전 문경공장을 지을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대신 조건을 붙였다.

“기자재와 기술은 한국산, 건설사도 한국 회사가 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물론입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시비뇽시멘트플랜트(P.T. SEMEN CIBINONG)' 건설과 운영의 총괄책임을 맡게 되었다. 최적의 입지를 찾기 위해 인도네시아 전역을 답사했다. 그 결과 점찍은 곳이 자카르타 근교 동북부 나르공이었다. 석회석이 풍부한 곳이어서 수하르토 대통령이 원하는 연산 150만 톤 규모의 최신식 공장을 짓기에 적합했다.

시비뇽공장 건설 시공사인 현대건설로부터 받은 감사패

약속대로 기자재와 기술은 전부 한국산으로 하고 공장 건설은 현대건설에서 하도록 했다. 시비뇽공장을 건설하면서 현지 직원들과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아 뭘 알려주려고 해도 한계가 있었다. 차라리 내가 인도네시아어를 배워 소통하는 게 빠르겠다고 생각했다.

인도네시아어를 속성으로 배워 소통하니까 일이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인도네시아어는 그렇게 내 인생의 일곱 번째 언어가 되었다. 인도네시아는 1만3,000여 개로 구성된 세계 최대의 섬나라로 적도를 관통하는 열대지방이다. 날이 늘 무더웠다. 연중 아침 6시에 해가 뜨고 6시에 해가 져 기온이 30도 이상이었다. 땀이 비 오듯 하고 불쾌지수는 극에 달해 작업 능률이 오르지 않았다. 나는 낮 12시부터 두 시간은 무조건 휴식을 취하도록 했다.

도마뱀도 큰 골칫거리였다. 숙소를 들어가면 방 안에 도마뱀이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불 위로도 기어 다녔다. 처음엔 밤새도록 잠을 못 잤다. 하지만 피곤보다 무서운 도마뱀은 없었다. 날마다 새벽같이 일어나 밤늦게까지 일하다 보니 숙소에 들어가면 그냥 쓰러져 도마뱀이 있는데도 쿨쿨 자게 되었다.

열대기후, 열악한 지리환경, 낯선 이슬람문화로 힘들어 할 때마다 나는 직원들을 독려했다. 한국의 시멘트기술을 인도네시아에 전파한 주역들의 얼굴이 지금도 생생하다. 설계 담당 박경재, 기계 시운전 담당 김원복, 건설 담당 김철수…….

점심시간에 밥 먹고 모두 쉬는데 나의 유일한 휴식이었던 바둑의 상대가 되어 준 박경재에게 특히 감사하다. 그는 나에게 바둑을 일부러 져주어서 내가 예뻐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정작 나는 그의 바둑 실력보다 시멘트공장 설계 실력이 훨씬 더 뛰어났다고 확신한다.

열악한 환경과 문화 차이를 극복하고 우리는 2년 반 만에 시비뇽공장을 완공했다. 한국의 뛰어난 기자재와 기술력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시멘트플랜트기술의 첫 수출이자 ‘배우는 나라’에서 ‘가르치는 나라’로 거듭난 쾌거였다.

공장이 완공되어 시운전을 하려는데 수하르토 대통령이 또 한 차례 나를 불렀다.

“우리 직원들이 공장을 제대로 운전할 수 있도록 훈련해 주십시오.”

공장장을 비롯해 직원들을 40명씩 나누어 3개월씩 동양시멘트 삼척공장으로 데려다 현장실습(OJT)을 시켜 돌려보냈다. 한국에서 기술을 습득한 인도네시아인들에 의해 시멘트 생산이 원만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나중에 들으니 생산효율이 두 배로 늘었다고 했다. 인도네시아도 시멘트 생산기술에서 자립하게 된 것이다.

1992년 말 수하르토 대통령도 참석한 가운데 시비뇽공장 확장공사 준공식을 가졌다. 연간 150만 톤의 시멘트를 증산해 총 300만 톤을 생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후 인도네시아는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자체 기술로 시멘트공장을 짓기 시작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나를 최고자문으로 위촉했고, 나는 꽤 오랫동안 자문을 해주었다.

시비뇽공장은 우리나라 시멘트 기술을 수출한 최초의 사례다. 외국에서 도입해 발전시킨 기술을 해외에 나가 수출한 것은 큰 의의가 있다. 몇 년 후 엔지니어클럽에서 만난 이부섭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이 내게 물었다.

“인도네시아에 갔다가 멋진 시멘트공장을 보게 되었는데, 현지 직원에게 물어보았더니 글쎄 한국사람이 지은 공장이라고 하더군요. 깜짝 놀랐습니다. 회장님도 그거 알고 계셨습니까?”

내가 웃으며 말했다.

“그거 내가 지은 거요.”

수하르토 대통령은 나와 한국에 무척이나 고마워했다. 인도네시아 사람들도 내가 가면 다 좋아했다. 수하르토 대통령은 1921년생으로 나보다 두 살 아래라 나를 형처럼 생각했다. 내가 인도네시아에 최신식 시멘트공장을 지어주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말이 통하니까 더욱 친근감을 느꼈다.

인도네시아에 있을 때 일흔이 넘은 나이에 더운 나라에서 일하는 것을 걱정한 아내와 아이들이 손주들과 함께 찾아오곤 했다. 인도네시아 당국에서는 나의 가족들에게 융숭한 대접을 해주었다. 큰 밴을 타고 자카르타의 이곳저곳을 구경하기도 하고 발리섬에도 갔다. 손주들이 할아버지 덕분에 최고의 호텔에서 최고의 음식을 먹게 되었다며 좋아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 남기동 선생은...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100살이다. 일본 제6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신생 이공학부 응용화학과에 편입했다. 1946년 중앙공업연구소 지질광물연구소장, 요업 과장으로 근무하며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 등에도 출강했다. 부산 피난 중에도 연구하며 공학도들을 가르쳤다. 6·25 후 운크라 건설위원장을 맡아 1957년 연산 20만 톤 규모의 문경시멘트공장을 건설했다. 화학과장, 공업국 기감(技監)으로 인천판유리공장, 충주비료공장 등 공장 건설 및 복구사업을 추진했다. 1960년 국내 대학 최초로 한양대에 요업공학과를 창설하고 학과장을 맡았다. 1962년 쌍용양회로 옮겨 서독 훔볼트의 신기술 ‘SP킬른(Kiln)’ 방식으로 1964년 연산 40만 톤 규모의 영월공장을 준공했는데, 최단 공사기간을 기록해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영월공장 준공으로 우리나라는 시멘트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1968년 건설한 동해공장은 단위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공장 증설을 거듭해 1992년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량은 세계 5위가 되었다. 1978년 동양시멘트로 자리를 옮겨 2차 오일쇼크 때 시멘트 생산 연료를 벙커씨유에서 유연탄으로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 특허 대신 공개를 택해 업계를 위기에서 살려냈다. 이 공적으로 1981년 '3·1 문화상(기술상)'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 요청으로 1992년 인도네시아 최초의 시멘트공장인 '시비뇽 시멘트플랜트(P.T. SEMEN CIBINONG)'를 건설했다. 한국요업(세라믹) 학회, 한국화학공학회, 대한화학회등 3개 학회, 대한요업총협회(지금의 한국세라믹총협회) 회장으로 학계와 산업계의 유대를 다졌다. 학교, 연구소, 산업체가 참석하는 '시멘트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를 조직해 학술교류는 물론 민간교류에도 힘썼다. 세라믹학회는 그의 호를 따 장학지원 프로그램인 '양송 상'을 제정했다. 1993년 인하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2006년 서울대 설립 60돌 기념 '한국을 일으킨 60인' 상, 2007년 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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