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시멘트산업의 살아있는 역사] 남기동 회고록(57) 세라미스트의 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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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시멘트산업의 살아있는 역사] 남기동 회고록(57) 세라미스트의 요람
  • 남기동
  • 승인 2019.06.1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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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비전e] 시멘트, 내화물, 유리 공업은 전후 국가를 재건하고 대한민국의 오늘을 만든 주역이었다. 그래서 요업인(세라미스트) 모두는 한국 현대화의 역군이며 유공자라고 자부한다.

우리나라 요업계는 한양대 요업공학과 졸업생들에 의해 가동되고 발전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한양대 요업공학과 졸업생들은 학계, 연구소, 기업에 고루 포진되어 교수, 책임자, 경영자로 크게 활약했다.

나는 1962년 쌍용시멘트 공장 신설 책임을 맡게 되어 교단을 떠나게 되었다. 나와 함께, 그리고 나의 뒤를 이어 요업공학과를 이끌며 수많은 세라미스트를 길러낸 이종근, 이희수, 지응업, 이응상, 최상흘 교수와 나의 첫 번째 제자들인 요업공학과 1회 졸업생들을 비롯해 그 후배들까지 한국 요업 발전에 큰 업적을 남겼다.

한양대에 요업공학과가 창설된 지 60년이 다 되어간다. 그 사이 우리 요업계도 괄목할 만한 성장을 했다. 한국 요업(세라믹)산업의 발달은 그에 필요한 인력 수급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950년대까지 우리나라 요업 분야의 고등교육 및 연구 기관을 보면, 몇몇 대학의 화공과에서 요업(규산염공업) 과목을 강의하는 정도였고, 연구기관으로는 중앙공업연구소 요업과뿐이었다.

일요회 회원들과

한양대 공대에 요업공학과가 설립되면서 1964년 요업을 전공한 공학사 38명이 처음 배출되었다. 이는 오늘날 여러 대학의 세라믹 전공 학과 설치의 선도적 역할을 했다. 1960년대 후반 고려대, 연세대, 인하대, 서울대(재료공학과로 창설, 후에 요업공학과로 변경)에, 그리고 지방에는 전남대, 부산대 등에 요업공학과가 설립되어 오늘날의 세라믹산업을 일으킨 인력을 공급했다.

그때의 제자들이 1970~80년대 공업입국의 역군으로 산업 현장에서 뛰었고, 당시 ‘요업’ 또는 ‘세라믹’이란 이름이 붙은 공장에 가보면 우리 졸업생들의 활기찬 모습이 있었다. 그들의 아이디어로 공정이 개선되고 능률이 향상되었다고 칭찬하는 선배 엔지니어와 경영인들을 만날 때마다 보람을 느꼈다.

우리 과 졸업생들은 오늘날 핵심소재 부품산업, 기능성 세라믹스, 구조재료 세라믹스 등 세라믹 발전의 선도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정보기술(IT), 환경기술(ET), 생명기술(BT) 등과 접목해 융합기술로 진출하는 밑거름이 되어 주었다.

그들 중 일부는 학업에 정진해 여러 대학에 창설된 요업공학과, 세라믹공학과, 신소재공학과 교수로 후진 양성에 힘쓰며 연구에 매진하고 학회활동을 통해 산(기업)-학(대학)-연(연구소)-관(정부)을 연계하고 있다. 요즘 그들의 제자가 배출되어 손자뻘 되는 세라미스트들의 활약하는 모습을 볼 때 감개가 무량하다.

나는 교단을 떠난 후에도 쌍용양회, 동양시멘트, 요업학회, 요업총협회 등에서 평생을 요업과 함께 보냈다. 100세의 나이에도 젊은 세라미스트에서부터 중견 세라미스트에 이르는 모든 세라미스트와 함께 젊게 지내게 된 것도 그때 교단생활에서 얻은 젊은 정기가 스며들어서가 아닌가 생각한다.

요업공학과 1회 졸업생들의 모임인 ‘일요회’가 있다. 졸업 후 지금까지 50년 넘게 매달 모여 정보를 교환하고 친목을 도모하고 있다. 연말이면 옛 스승을 모시고 한 해의 갖가지 일을 이야기하며 새해를 맞는 그들의 정과 성의를 잊을 수 없다. 나 역시 최근 몇 해 전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송년회에 참석해 제자들과 추억을 맞춰보곤 했다.

◆ 남기동 선생은...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100살이다. 일본 제6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신생 이공학부 응용화학과에 편입했다. 1946년 중앙공업연구소 지질광물연구소장, 요업 과장으로 근무하며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 등에도 출강했다. 부산 피난 중에도 연구하며 공학도들을 가르쳤다. 6·25 후 운크라 건설위원장을 맡아 1957년 연산 20만 톤 규모의 문경시멘트공장을 건설했다. 화학과장, 공업국 기감(技監)으로 인천판유리공장, 충주비료공장 등 공장 건설 및 복구사업을 추진했다. 1960년 국내 대학 최초로 한양대에 요업공학과를 창설하고 학과장을 맡았다. 1962년 쌍용양회로 옮겨 서독 훔볼트의 신기술 ‘SP킬른(Kiln)’ 방식으로 1964년 연산 40만 톤 규모의 영월공장을 준공했는데, 최단 공사기간을 기록해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영월공장 준공으로 우리나라는 시멘트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1968년 건설한 동해공장은 단위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공장 증설을 거듭해 1992년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량은 세계 5위가 되었다. 1978년 동양시멘트로 자리를 옮겨 2차 오일쇼크 때 시멘트 생산 연료를 벙커씨유에서 유연탄으로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 특허 대신 공개를 택해 업계를 위기에서 살려냈다. 이 공적으로 1981년 '3·1 문화상(기술상)'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 요청으로 1992년 인도네시아 최초의 시멘트공장인 '시비뇽 시멘트플랜트(P.T. SEMEN CIBINONG)'를 건설했다. 한국요업(세라믹) 학회, 한국화학공학회, 대한화학회등 3개 학회, 대한요업총협회(지금의 한국세라믹총협회) 회장으로 학계와 산업계의 유대를 다졌다. 학교, 연구소, 산업체가 참석하는 '시멘트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를 조직해 학술교류는 물론 민간교류에도 힘썼다. 세라믹학회는 그의 호를 따 장학지원 프로그램인 '양송 상'을 제정했다. 1993년 인하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2006년 서울대 설립 60돌 기념 '한국을 일으킨 60인' 상, 2007년 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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