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19-10-17 18:07 (목)
[대한민국 시멘트산업의 살아있는 역사] 남기동 회고록(55) 청자를 꿈꾸는 요강
상태바
[대한민국 시멘트산업의 살아있는 역사] 남기동 회고록(55) 청자를 꿈꾸는 요강
  • 남기동
  • 승인 2019.06.17 09: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뉴스비전e] 김연준 총장과 약속한 대로 나는 창설된 요업공학과의 학과장을 맡았다. 요업공학과와 동시에 신설된 공업경영학과 이근희 교수와 한 방에서 책상을 마주보고 있었다. 그때 이 교수로부터 산업경영학에 대한 귀중한 이론과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은 훗날 쌍용시멘트와 동양시멘트에서 경영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신생 요업공학과의 교수진을 구성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미국에서 학위를 받고 귀국한 지응업, 조종수, 이종근, 이희수 교수 등 중진 교수들을 영입했다. 모두 다년간 연구 업적이 있고 요업 분야에서 명성도 높은 학자들이었다. 그들과 함께할 수 있던 것은 행운이었다.

우리 교수진을 도와주기 위해 화공과 대학원생이던 최상흘, 이응상이 조교를 맡아 수고했다. 둘 다 요업에 대한 열정이 상당한 공학도로, 일본 동경공대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요업공학과 교수가 되었다.

한양대에서 국내 대학 최초로 요업공학과 1회 입학생을 모집한 1960년은 4・19가 일어난 해다. 학생들의 전국적인 시위가 극렬했다. 제대로 강의를 들을 수도, 할 수도 없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당시 요업공학과는 광산공학과 1학년과 합반으로 운영되어 100명이 넘었다. 1학년 때는 공통으로 들어야 할 기본 과목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합반을 하는 것이 여러모로 효율적이었다.

다른 과에서는 합반한 두 학과를 각각의 첫 글자를 따 ‘요광과’라고 부르다 ‘요강과’로 부르게 되었다. ‘요업’이라는 용어 자체도 생소한 시절, 요업이 ‘요강이나 만드는 일’이라고 치부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졸지에 ‘요강과’ 학과장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수강생이 100명이 넘다 보니 강의실은 북새통을 이루었다. 강의실 중간부터는 교수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마이크도 없던 시절이라 더욱 그랬다.

강의실은 그렇다 치고 실습실도 부족하고 실습기자재 또한 요즘과 비교하면 전무하다시피 했다. 어느 실습시간은 몇몇 학생만 제대로 실습에 참여하고 나머지는 서 있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흰 가운을 입은 학생들이 뒷동산으로 올라가 담소하기도 했다. 멀리서 바라보면 학 떼가 앉아 있는 것 같았다.

그 시절에는 한양대 교문 앞으로 전차가 지나다녔다. 왕십리에서 재배된 배추며 무 같은 야채를 시내로 실어 나르기 때문에 한여름이면 만원 전동차에는 채소 썩는 냄새, 거름냄새가 진동했고 파리 떼가 윙윙대 등하굣길에 곤욕을 치러야 했다. 하지만 교수들과 학생들의 열정은 무더위보다 뜨거웠다.

교수진과 학생들의 도전과 열정에 학교에서도 신생 요업공학과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요업공학과를 인큐베이팅하고 육성하기 위한 예산을 배정해 연구와 실습에 필요한 시설과 기자재를 확충하는 데 공을 들였다. 정부로부터도 지원을 받았다. 대일청구권 자금을 배당받아 연구기자재를 도입하고 실습공장도 지을 수 있었다. 이런 지원으로 명실공히 우리나라 첫 요업공학과의 면모가 갖추어져 갔다.

해가 바뀌어 전공과목 강의가 시작되자 세라믹스 탐구의 열기는 고조되었다. 실험과 연구 시설도 보완되어 ‘세라믹 탐구의 산실’로 손색이 없게 되었다. 첫 실습자재로 시차열분석장치(DTA)를 들여왔다. 연구실에서 상자를 뜯고 취급설명서를 읽어가면서 한 조각 한 조각 정성껏 조립했다. 12,000달러나 하는 첫 기계를 못 쓰게 만들면 큰일이기 때문이었다.

요업은 물론 세라믹이란 낱말도 낯선 시기에 요업의 ‘요(窯)’자도 모르는 학생도 많았다. 우리 교수진은 요업의 세계와 전망을 가르치며 희망을 심어주었다.

자기 키 만한 T자를 들고 만원버스에 시달리면서도 공대생임을 자랑스러워하며 등교하던 여학생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당시 공대에는 여학생이 극히 드물었다.

학교버스를 타고 공장견학을 가서 학교에서 못 다한 현장교육을 하기도 했다. 현장에 있는 선배 엔지니어들은 후배 요업공학도들을 반겨주며 애정어린 눈빛과 말로 공정을 설명해 주었다.

견학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가는 후배들을 배웅하며 열심히 배워 현장에서 동료로 다시 만나자며 “파이팅!”을 외쳤다.

◆ 남기동 선생은...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100살이다. 일본 제6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신생 이공학부 응용화학과에 편입했다. 1946년 중앙공업연구소 지질광물연구소장, 요업 과장으로 근무하며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 등에도 출강했다. 부산 피난 중에도 연구하며 공학도들을 가르쳤다. 6·25 후 운크라 건설위원장을 맡아 1957년 연산 20만 톤 규모의 문경시멘트공장을 건설했다. 화학과장, 공업국 기감(技監)으로 인천판유리공장, 충주비료공장 등 공장 건설 및 복구사업을 추진했다. 1960년 국내 대학 최초로 한양대에 요업공학과를 창설하고 학과장을 맡았다. 1962년 쌍용양회로 옮겨 서독 훔볼트의 신기술 ‘SP킬른(Kiln)’ 방식으로 1964년 연산 40만 톤 규모의 영월공장을 준공했는데, 최단 공사기간을 기록해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영월공장 준공으로 우리나라는 시멘트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1968년 건설한 동해공장은 단위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공장 증설을 거듭해 1992년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량은 세계 5위가 되었다. 1978년 동양시멘트로 자리를 옮겨 2차 오일쇼크 때 시멘트 생산 연료를 벙커씨유에서 유연탄으로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 특허 대신 공개를 택해 업계를 위기에서 살려냈다. 이 공적으로 1981년 '3·1 문화상(기술상)'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 요청으로 1992년 인도네시아 최초의 시멘트공장인 '시비뇽 시멘트플랜트(P.T. SEMEN CIBINONG)'를 건설했다. 한국요업(세라믹) 학회, 한국화학공학회, 대한화학회등 3개 학회, 대한요업총협회(지금의 한국세라믹총협회) 회장으로 학계와 산업계의 유대를 다졌다. 학교, 연구소, 산업체가 참석하는 '시멘트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를 조직해 학술교류는 물론 민간교류에도 힘썼다. 세라믹학회는 그의 호를 따 장학지원 프로그램인 '양송 상'을 제정했다. 1993년 인하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2006년 서울대 설립 60돌 기념 '한국을 일으킨 60인' 상, 2007년 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