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매일신문에 실린 평양중학교 졸업생 중 우등상과 개근상 수상자 기사. 맨 위 사진이 나.

[뉴스비전e] “성공은 1퍼센트의 영감과 99퍼센트의 노력이다.”

나는 에디슨만큼 성공하지도 않았고, 유명하지도 않지만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학창시절을 되돌아보아도 그렇고, 연구소와 대학에서 연구하고 가르칠 때도 노력이 절대적인 성공비결이었음을 나는 확신한다.

사람들은 공부는 타고나거나 특별한 비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수학에만 왕도(Royal road, 지름길)가 없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공부에도 지름길 같은 것은 없다. 쉬운 방법을 찾아가려고 요령을 부리는 것은 공부를 망치는 악마의 유혹 같은 것이다. 공부하는 방법을 찾느라 고심하는 시간에 한 자라도 더 익히는 것이 낫다.

영어공부를 할 때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문장을 통째로 외우는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반문들을 하지만, 반드시 외우고야 말겠다는 생각으로 무조건 달달 외우면 어느새 자기 것이 되어 입에서 절로 터져 나온다. 내가 공부하던 시절에는 영어사전도 통째로 외우겠다고 작정하면 정말로 외울 수 있었다.

사람들은 내가 7개 국어를 한다고 하면 모두 놀라곤 한다. 역시 비법은 따로 없다. 무조건 외우는 것이다. 우리말은 태어나면서부터 한 것이고, 일제강점기에 일본학교를 다녔으니 일본어도 우리말처럼 하고 영어와 독일어는 학교에서 배울 때 마스터했다. 덴마크어는 문경시멘트공장을 지으려고 덴마크로 기술 배우러 갔을 때 배웠고, 일흔이 넘어 인도네시아에서 시멘트공장을 지어달라고 해서 인도네시아어도 배웠다. 스페인어와 스웨덴어도 익혔다.

어느 나라를 가든 출국하기 두 달 전부터 필요한 모든 문장을 달달 외어 마스터하는 게 출장준비 중 하나였다. 나에게 특별한 외국어 습득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입에 침이 마르도록 외고 또 외는 반복훈련의 결과다.

눈으로 읽고, 입으로 말하고, 손으로 쓰기를 반복하면 아무리 어려운 공부도 눈이 기억하고, 입이 기억하고, 손이 기억하게 된다. 머리로만 하는 공부가 아니라 몸이 기억하는 공부를 해야 진짜 내 것이 되는 법이다. 머리의 기억에만 의존하지 말고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몸의 기억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

공부에 열중할 때는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아야 한다. 나는 한번 공부에 몰두하면 밥을 먹을 때도, 화장실에 갈 때도 한손에는 언제나 책이 들려 있었다. 그것을 보고 자란 아이들도 나처럼 그렇게 공부를 몸에 붙였다.

공부는 습관이다. 내가 어렸을 때도 그랬고, 아이들을 키울 때도 그랬지만 우리집은 언제나 밤 10시면 불이 꺼졌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은 공부의 기본이다. 몰입을 위해서는 충분한 수면이 필수다. ‘아침형 인간’이 되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시간을 공부해도 능률이 오르지 않는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아먹고,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 법이다.

공부는 노력한 만큼 성과가 나오는 법이다. 군인에게 최고의 복지는 휴가가 아니라 훈련이다. 전투가 벌어졌을 때 살아남는 병사는 휴가를 많이 다녀온 병사가 아니라 훈련을 열심히 한 병사이기 때문이다.

공부도 마찬가지다. 학생에게 최고의 복지는 방학이 아니라 공부다. 훈련이든 공부든 실전처럼 해야 한다. 실전처럼 훈련하고 훈련한 대로 싸워야 전투에서도 이길 수 있고, 인생에서도 성공할 수 있다.

아무리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있어도 공부가 습관이 되지 않으면 성과를 거둘 수 없다. 머리만 믿고 학업을 게을리 하는 학생치고 나중에까지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경우를 나는 보지 못했다.
그래서 나에겐 우등상보다 개근상이 더 값지다.

평양공립중학교 시절 나는 우등상과 함께 개근상을 받았는데 당시에는 그것이 엄청난 사건이었다. 의료시스템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던 1930년대에는 아이들이 허약하고 병치레가 잦아 개근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아파도 기어서라도 학교에 갔다. 그건 아버지의 철칙이기도 했다.

나는 우등상과 함께 개근상을 받았다고 신문(평양매일신문) 에 사진과 기사가 실렸다. 모두 다섯 명의 졸업생이 실렸는데 일본인학교의 유일한 조선인 학생으로 가장 위에 랭크되었다.

일본 6고에서도 우등상과 함께 개근상을 받아 현지 신문에 소개되었다. 학교가 있는 오카야마(岡山)에는 해마다 전염병이 돌아 현지 학생들도 대부분 학교에 나오지 않는 기간에도 나는 이를 악물고 등교했다.

그 결과 나는 제6고에서 10년 만에 첫 개근상 수상자가 되었다. 그러니 신문에 대서특필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졸업 후 연구소, 정부기관, 대학, 기업체 등 어느 곳에 근무하더라도 결근한 적이 없다. 그걸 보고 자란 6남매 모두 결석이나 결근은 꿈도 꾸지 못했다.

학업이든 업무든 부지런함이 만든다는 것은 내가 100년 살아오면서 터득한 진실이자 지혜다. 아무리 재능 있는 사람도 열심히 하는 사람을 당해낼 수 없고, 아무리 열심히 하는 사람도 즐기는 사람을 당해낼 수 없다고 했다. 열심히 하는 것이 즐기는 단계까지 가면 당해낼 사람이 없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내가 어떻게 백 살이 되도록 건강을 유지하는지 신기해한다. 전혀 신기해할 일이 아니다. 일상적이고 습관적으로 건강을 관리하면 된다. 특별하고 요란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다. 돈을 쓰지 않는 운동이 진짜 운동이다.

나의 운동은 크게 두 가지다. 걷기와 줄넘기다. 걸어 다닐 수 있는 거리는 늘 걸어 다녔고, 줄넘기는 날마다 3,000번씩 했다. 그렇게 하면 다리가 쇳덩어리처럼 단단해진다.

막내아들 명현이는 세 살 때 소아마비를 앓았다. 척수성 소아마비(폴리오)는 전염병으로 수족에 마비가 일어난다. 동네에서 명현이 또래 여럿이 병을 이기지 못하고 소아마비라는 가혹한 장애를 얻게 되었다.

나는 명현이의 장래가 걱정되었다. 하지만 걱정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재활훈련을 해야 했다. 무엇보다 다리 근육을 발달시켜야 했다. 그 시절에는 재활치료를 할 만한 곳도 장치도 없었다. 집에서 일상적으로 훈련하는 수밖에 없었다.

1956년 소아마비를 이겨내고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된 윌마 루돌프(Wilma Glodean Rudolph)의 이야기에서 힌트를 얻었다. 미국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루돌프는 네 살 때 성홍열을 심하게 앓고 폐렴에 걸린 후 왼쪽 다리가 한쪽으로 휘기 시작했다. 의사는 소아마비 선고를 내렸고 “다시는 걷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윌마는 다리에 교정기를 부착했고 열한 살이 될 때까지 제대로 걷지 못했다. 그러나 윌마의 어머니는 딸에게 “하나님이 주신 능력과 끈기, 그리고 믿음만 있으면 네가 원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격려했다. 그러자 윌마가 외쳤다.

“난 세상에서 가장 빨리 달리는 여자가 되고 싶어요!”

아홉 살이 되던 해 윌마는 자신에게 도전장을 던졌다. 교정기를 떼고 다시는 걸을 수 없을 거라고 말했던 의사를 향해 한 발자국 걸어갔다.

모든 것이 가족의 힘이었다. 어머니는 윌마를 매주 토요일 내슈빌에 있는 메하리 대학병원에 데리고 가서 물리치료와 마사지를 받도록 했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마사지하는 것을 주의 깊게 관찰한 후 집에서 똑같이 치료했다. 다른 자녀에게도 그 방법을 가르쳤다.

어머니와 언니 오빠는 하루에 네 번 이상 윌마의 다리를 마사지했다. 통증이 컸지만 윌마는 남들처럼 걷겠다는 일념으로 재활치료에 최선을 다했다. 온 가족이 보살핀 덕분에 윌마는 조금씩 나아져 갔다. 윌마는 훗날 이렇게 말했다.

“의사들은 다시 걸을 수 없을 거라고 말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고, 나는 어머니를 믿었다.”

다리가 조금씩 회복되면서 윌마는 달리기를 시작했다. 열세 살 때 처음 육상경기에 참가해 모든 이의 염려를 뒤로하고 완주했다. 우승할 때까지 경기에 참여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열다섯 살 때 테네시주립대에 입학했고 에드 템플 코치를 만났다. 윌마는 코치에게 자신의 소원을 말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육상 선수가 되고 싶어요.”

코치가 대답했다.

“정신력으로 이겨내면 반드시 해낼 수 있을 게다. 내가 도와주마.”

훈련에 매진한 윌마는 1956년 열여섯의 나이로 멜버른올림픽에 참가해 400미터 계주에서 동메달을 획득하면서 자신감을 얻었다. 1960년 로마올림픽에 참가해 100미터, 200미터, 400미터 계주에서 금메달을 땄다. 어린 시절 다리가 마비된 채 살아가던 한 소녀가 가장 빠른 여자가 된 것이다.

1960년 로마올림픽 100미터 결승에서 1위로 들어오는 윌마 루돌프

꿈과 희망이 있으면 강물을 거슬러 오를 수 있다. 그런데 또 필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그 꿈을 이루기 위한 용기와 열정이다.

윌마의 기적을 보며 명현이에게도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다. 오른쪽 다리에 마비가 온 이후로 발육이 늦어져 왼쪽 다리와 균형이 맞지 않게 될 것으로 보였다. 그러니 어릴 때부터 오른쪽 다리를 집중적으로 발달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의료적인 접근이라기보다는 공학적인 접근이었다.

첫 번째 아이디어는 포고스틱(pogo stick, 일명 ‘스카이콩콩’)의 왼쪽 발판을 떼어내고 말을 잘 듣지 않는 오른쪽 다리로만 타게 한 것이다. 처음엔 힘이 약해 쉽지 않았지만 재미를 붙이게 했다. 구구단을 외우며 박자에 맞춰 타고 뛰어놀게 했다. 공부와 재활을 병행한 것이다.
세발자전거의 왼쪽 페달도 떼어냈다. 오른쪽 발로만 페달을 밟게 해 오른쪽 다리 근육을 강화시킬 수 있었다.

내가 장기간 해외출장을 가게 되면 둘째아들 세현이가 대신 어린 동생의 트레이닝을 지도했다. 세현이도 아직 어리긴 했지만 동생에게 왜 이런 훈련이 필요한지 잘 이해하고 있었다. 영특한 세현이도 나중에 나처럼 공학도가 되었다. 지루하면 영어책을 통째 외우며 동생의 재활을 도왔다.

그 덕분이었을까. 명현이는 함께 소아마비를 앓았던 친구들과 확연히 다르게 성장했다. 모르는 사람들은 겉으로는 장애가 있는 줄 모른다. 함께 자란 형과 누나들도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사위와 며느리들도 말해주기 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다.

당시 명문 고등학교들 몇 곳은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장애가 있는 학생의 입학을 허가하지 않았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차별이었다. 편견과 선입견은 장애인에게 장애보다 더 한 상처를 준다는 것을 그때 체감했다.

명현은 세상의 편견에 아랑곳하지 않고 의대에 당당히 합격했다. 나는 명현이 의사가 되었다는 것이 기쁘다. 의사라는 직업이 유망해서라기보다 장애를 이해하는 의사가 탄생했다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희망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명현이를 볼 때 가끔씩 외발판 포고스틱과 외페달 세발자전거를 타며 놀던 모습이 떠오르곤 한다. 훈련은 추억이다.

 

◆ 남기동 선생은...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100살이다. 일본 제6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신생 이공학부 응용화학과에 편입했다. 1946년 중앙공업연구소 지질광물연구소장, 요업 과장으로 근무하며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 등에도 출강했다. 부산 피난 중에도 연구하며 공학도들을 가르쳤다. 6·25 후 운크라 건설위원장을 맡아 1957년 연산 20만 톤 규모의 문경시멘트공장을 건설했다. 화학과장, 공업국 기감(技監)으로 인천판유리공장, 충주비료공장 등 공장 건설 및 복구사업을 추진했다. 1960년 국내 대학 최초로 한양대에 요업공학과를 창설하고 학과장을 맡았다. 1962년 쌍용양회로 옮겨 서독 훔볼트의 신기술 ‘SP킬른(Kiln)’ 방식으로 1964년 연산 40만 톤 규모의 영월공장을 준공했는데, 최단 공사기간을 기록해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영월공장 준공으로 우리나라는 시멘트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1968년 건설한 동해공장은 단위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공장 증설을 거듭해 1992년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량은 세계 5위가 되었다. 1978년 동양시멘트로 자리를 옮겨 2차 오일쇼크 때 시멘트 생산 연료를 벙커씨유에서 유연탄으로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 특허 대신 공개를 택해 업계를 위기에서 살려냈다. 이 공적으로 1981년 '3·1 문화상(기술상)'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 요청으로 1992년 인도네시아 최초의 시멘트공장인 '시비뇽 시멘트플랜트(P.T. SEMEN CIBINONG)'를 건설했다. 한국요업(세라믹) 학회, 한국화학공학회, 대한화학회등 3개 학회, 대한요업총협회(지금의 한국세라믹총협회) 회장으로 학계와 산업계의 유대를 다졌다. 학교, 연구소, 산업체가 참석하는 '시멘트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를 조직해 학술교류는 물론 민간교류에도 힘썼다. 세라믹학회는 그의 호를 따 장학지원 프로그램인 '양송 상'을 제정했다. 1993년 인하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2006년 서울대 설립 60돌 기념 '한국을 일으킨 60인' 상, 2007년 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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