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루피, 사상 최저치 추락…중앙은행 개입 멈추자 시장 공포 확산

2025-11-23     최규현 기자
사진=뉴시스 제공.

인도 루피화가 11월 21일(현지시간) 미국 달러 대비 사상 최저치로 떨어지며 환율 시장에 강한 충격을 주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루피는 이날 한때 0.9% 급락해 달러당 89.4812루피까지 떨어졌고, 심리적 지지선으로 여겨져 온 ‘89루피 선’이 무너지자 낙폭이 더욱 확대되었다. 많은 시장 참가자들은 인도 준비은행(RBI)이 해당 구간에서 환율 방어에 나설 것으로 예상했으나, 예상과 달리 중앙은행이 개입에 나서지 않으면서 시장 불안이 빠르게 퍼졌다.

코타크증권의 외환 전략가 아닝디아 배너지는 “중앙은행이 움직이지 않자 현물시장과 역외시장 참여자들이 보유한 달러 공매도 포지션을 급히 청산했다”고 설명했다. HDFC증권의 딜립 파마 외환 애널리스트도 “시장에 분명 공포가 있다”며 “RBI가 89루피 방어에 나설 것이라는 기대가 무너졌다”고 말했다.

인도 중앙은행은 지난 몇 주간 루피의 과도한 하락을 막기 위해 달러를 지속적으로 매도해 왔다. 10월 중순에는 공격적 개입을 통해 일시적으로 루피 강세를 유도했지만, 그 과정에서 외환 유동성과 보유고가 크게 감소했다. 실제로 RBI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9월 중순 이후 인도의 외환 보유액은 약 100억 달러 줄어들었다.

상황은 인도와 미국 간 무역협정 협상 지연으로 더욱 복잡해졌다. 인도는 최근 협정 체결이 가까워졌다는 신호를 보냈지만, 뚜렷한 진전이 없는 탓에 투자 심리가 약화됐다. 미국은 현재 인도산 상품에 평균 50% 관세를 부과하고 있어 아시아 국가 중 가장 높은 수준이며, 이는 인도 수출업체와 경제에 부정적 압력을 주고 있다.

ANZ의 외환 전략가 딜라지 님은 “달러 수요가 계속 증가하는 상황에서 중앙은행은 외환보유고 소진을 우려해 더 이상 특정 환율 수준을 고집하지 않는 모습”이라며 “무역협정이 언제 체결될지도 불확실하다”고 분석했다. 인도 메클레파이낸셜의 리트시 반살리 부사장은 “부정적 뉴스가 나온 것은 아니지만, 중앙은행이 개입을 멈춘 상황에서 강한 달러 수요가 루피 가치를 끌어내렸다”고 지적했다.

루피는 올해 들어 아시아 통화 중 가장 부진한 성적을 기록하고 있으며, 연중 달러 대비 낙폭은 이미 4.3%에 달했다. ANZ는 루피화가 단기적으로 달러당 89.40루피 근처에서 안정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으나, 시장은 여전히 RBI의 개입 여부와 미·인도 무역협정의 향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이번 사상 최저치 추락은 인도가 직면한 구조적 취약성과 대외 불확실성, 그리고 통화 방어 전략의 한계를 다시 한 번 드러내는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최규현 기자 kh.choi@nvp.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