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판 IMF 구상, 25년 만에 부활 조짐

2025-11-13     최규현 기자
사진=뉴시스 제공.

아시아판 국제통화기금(IMF) 창설 구상이 다시 활기를 띠고 있다. 한때 일본이 주도했다가 사라졌던 이 구상은 이제 아시아 각국의 재정적 자립 의지와 역내 통합 강화 움직임 속에서 새로운 동력을 얻고 있다.

지난 10월 27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아세안(ASEAN) 및 한중일 정상회의는 조용하지만 화합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회의 참석자들은 이번 회의가 아시아 국가들이 예측 불가능한 미국의 관세 정책과 트럼프 행정부 이후의 불확실한 경제 환경에 공동 대응하기 위한 협력 의지를 반영한 것으로 평가했다.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아시아판 IMF, 즉 ‘아시아통화기금(AMF)’ 설립 가능성에 대한 논의가 다시 부상하고 있다.

‘아시아통화기금’이라는 개념은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당시 일본이 처음 제안한 것으로, 위기 대응 과정에서 IMF가 부과한 강력한 재정 긴축 조건이 비판을 받으면서 비롯되었다. 당시 일본은 아시아의 실정에 맞춘 독자적인 구제금융 체계를 마련하기 위해 다국적 상설기구 설립을 추진했으나, IMF 최대주주였던 미국의 반대로 무산됐다. 미국 재무차관이던 로렌스 서머스를 비롯한 인사들은 일본의 주도를 경계하며 “미국의 참여 없이 금융 질서를 구축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후 AMF 구상은 오랫동안 묻혀 있었지만, 2023년 말레이시아 안와르 총리가 이를 다시 언급하면서 새로운 관심이 쏠렸다. 최근 2년간 아세안과 한중일은 위기 대응 프레임워크를 논의하며 각국이 자금을 선지급할 수 있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관련 사무국은 내년 중 기금 설립을 포함한 구체적 대안을 마련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구상 재부상의 배경에는 ‘탈달러화’ 움직임이 자리 잡고 있다. 아시아 국가들은 경제 성장으로 막대한 외환보유액과 무역 흑자를 쌓았지만, 여전히 달러 중심의 금융 구조에 종속되어 있으며, 미국의 금리 정책과 관세정책에 큰 영향을 받고 있다. 이에 따라 아시아 내부에서는 역내 통화를 중심으로 한 독자적 금융 시스템 구축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2000년 체결된 ‘치앙마이 이니셔티브’는 이러한 움직임의 시초였다. 이는 외환 결제 위기에 처한 국가가 역내 다른 국가의 외환보유고에서 단기 자금을 빌릴 수 있도록 한 협약으로, 현재 신용한도는 2,400억 달러 규모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절반 이상의 자금은 여전히 IMF의 지원 협정을 전제로 하고 있어 완전한 독립 구조라 보긴 어렵다.

아세안+3 거시경제연구소(AMRO)는 2011년에 설립되어 아시아의 금융위기 위험을 모니터링하고 있으며, 이를 토대로 AMF가 출범할 경우 위기대응의 기동성과 자금 조달의 유연성을 크게 높일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전문가들은 이번에는 1997년과 달리 미국이 AMF 구상을 묵인하거나 심지어 지지할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세계 경제 질서가 다극화되고, 주요 7개국(G7)의 영향력이 약화된 현재, IMF 단독으로 차기 아시아 금융위기를 감당하기는 어렵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이 2012년 부채위기 이후 유럽안정메커니즘(ESM)을 설립해 금융안정을 확보한 사례는 아시아에서도 유사한 모델의 필요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일부에서는 “아시아에 자체적인 위기대응 기금이 없는 것이 오히려 비정상”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향후 관건은 구체적 구조와 운용 방식이다. ‘치앙마이 이니셔티브’가 달러 중심에서 출발했듯, AMF가 엔화·위안화·바트화·싱가포르 달러·말레이시아 링깃 등 역내 통화로 운영된다면 중장기적으로 달러 의존도를 낮추는 중요한 전환점이 될 전망이다.

캄보디아 중앙은행 총재 셰스레이는 “바퀴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며 “시간이 걸리겠지만 달러 의존을 줄이고 자국 통화 사용을 확대하는 과정이 이미 시작됐다”고 말했다.

25년 만에 다시 부활한 아시아통화기금 구상은 단순한 지역협력 차원을 넘어, 달러 중심의 기존 금융 질서를 넘어서는 ‘아시아형 금융 자립체제’의 서막을 예고하고 있다.

최규현 기자 kh.choi@nvp.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