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발발 75주년, 영원히 기억될 역사적인 사건

2025-06-25     권원배 기자
사진=뉴시스 제공.

오늘은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희생하신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을 기억하는 6·25 전쟁 발발 일입니다.

70여 년 전,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이들의 정신을 되새기며, 6.25 발발 70주년을 맞아 얼마나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던 전쟁이며, 전쟁이 발발한 배경과 당시 상황을  돌이켜보고  우리가 누리는 평화에 감사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6.25전쟁은  1950년 6월부터 1953년 7월까지 3년 1개월간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이다. 

남북한은 물론이고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진영의 국가와 중국을 비롯한 공산주의 진영의 국가가 참전한 국제 전쟁이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중무장한 북한군이 북위 38도선을 넘어 전면적인 공격을 하였다. 

유엔(국제 연합)은 북한의 남침을 침략 행위로 규정하고 북한군에게 38도선 이북으로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북한은 이를 무시하고 남침을 계속했고, 미처 응전할 태세를 갖추지 못했던 남한은 속절없이 밀려났다.

소련과 중국의 도움을 얻어 빠르게 군사력을 키워 전쟁을 준비해 온 북한군은 전쟁이 시작된 지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8월에는 부산을 제외한 남한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이에 미국을 비롯한 16개국 병사들로 구성된 유엔군이 처음으로 조직되어 전쟁에 참여했다. 이로써 전쟁은 내전이 아닌 국제 전쟁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전력을 정비해 낙동강 전선에서 반격을 시작했고, 9월 15일에는 맥아더장군의 유엔군주력 부대인 미군과 한국군이 인천 상륙 작전으로 전세를 역전시켰다.

이후 국군과 유엔군은 북쪽으로 진격했고, 10월 말에는 대부분의 북한 지역을 장악했다.

하지만 전세는 중국군의 참전으로 역전되었고, 1951년 1월 초에는 서울이 다시 중국과 북한군의 손에 들어갔다.

전력을 가다듬은 국군과 유엔군은 3월에 서울을 탈환하고 38도선 근처까지 진격했다. 이후 38도선 근처에서 밀고 밀리는 싸움이 계속되었다.

전쟁이 시작된 지 1년 만인 1951년 6월, 소련이 유엔 대표를 통해 휴전을 제의했다. 유엔도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 기나긴 협상 결과, 1953년 7월 27일에 휴전 협정이 이루어지고 전쟁도 막을 내렸다. 휴전 협정에는 유엔군 대표, 중국과 북한 대표가 서명했다.

 

그러나 한국군의 작전권은 유엔군이 가지고 있었던 데다 이승만 대통령의 반대로 대한민국 대표는 참석하지 않았다.

이후 남한과 북한 사이에는 군사 분계선과 비무장 지대가 설치되었고 휴전 상태는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3년 1개월에 걸쳐 이어진 6 · 25 전쟁은 남북한 모두에게 커다란 피해를 가져다 주었다.

약 450만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다쳤고, 약 1,000만 명의 이산가족이 생겼으며, 공장이나 도로 등 산업 시설이 파괴되고 국토는 황폐해졌다.

게다가 남북한이 서로 큰 적대감을 갖게 되면서 이념 대결이 더욱 심해지고 분단의 아품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였다.

아~ 6.25!

요즘의 젊은이들은 그저 지나간 한편의 전쟁야화로 생각 할 것입니다.

다시는 우리 한반도에서는 물론  지구상에서도 전면전 성격의 전쟁은 없어야 할 것이라고 희망합니다. 

전장에서 순직한 순국선열과 전몰장병, 그리고 그 가족분들에게 글로서나마 마음을 바칩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모두 경건한 마음을 갖는 6월 25일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