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통화질서 전환의 기로에서…유럽, ‘글로벌 유로’의 기회를 맞다
스페인 이코노미스트가 6월 17일 보도한 바에 따르면, 세계 통화질서가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는 가운데 유럽은 유로화를 글로벌 기축통화로 도약시킬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를 맞고 있다.
수십 년간 미국 달러는 국제 금융 시스템의 중심축 역할을 해왔지만, 보호주의 확산과 지정학적 갈등 심화 속에서 그 지위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
유럽중앙은행(ECB)은 이러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유럽이 더 이상 수동적인 참여자가 아닌, 통화질서 재편의 주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ECB 총재 크리스틴 라가르드는 최근 연설에서 “지금이야말로 유럽이 유로화를 통해 세계 경제에서 자국의 운명을 직접 결정할 기회”라고 밝혔다.
현재 유로화는 글로벌 외환보유고에서 약 20%의 비중을 차지하며 달러(58%)에 이어 두 번째로 큰 통화다. 하지만 유로화의 국제적 위상을 실질적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경제적·제도적 개혁이 필수적이다.
라가르드는 유로화를 강화하기 위해 세 가지 핵심 축을 제시했다. 첫째, 유럽은 지정학적 신뢰성과 무역 영향력을 기반으로 국제사회에서 유로화의 신뢰도를 높여야 한다.
현재 EU는 세계 GDP의 약 40%에 해당하는 72개국과 무역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전체 무역량의 상당 부분이 유로화로 표시되고 있다. EU는 새로운 무역 협정을 통해 유로화의 영향력을 더욱 확대할 수 있다.
둘째, 유로존의 경제 회복력과 자본시장 강화가 필수적이다. 유로화가 국제 무대에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통합된 자본시장, 유동성 높은 안전자산, 견고한 성장 기반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 유럽은 낮은 성장률, 통합되지 않은 금융 시스템, 제한된 범위의 공동 안전자산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다. 특히 독일 국채가 사실상 유일한 안전자산으로 기능하고 있어, 유로화의 국제화를 견인하기엔 한계가 있다는 평가다.
셋째, 유럽 제도의 신뢰성 강화와 구조 개혁이 요구된다. 라가르드는 “26개 회원국의 집단 이익이 단 하나의 거부권으로 좌초되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며, 핵심 정책 결정에서 다수결 원칙을 보다 넓게 적용할 것을 제안했다.
유럽연합의 법치주의, 제도적 독립성, 중앙은행의 신뢰도는 국제 투자자에게 중요한 안정 요인이며, 이는 유로화가 지닌 비교우위 중 하나다.
유로화의 글로벌화가 가져올 실질적 혜택도 크다. 통화 지위가 높아지면 유럽 국가들과 기업들은 낮은 금리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어 재정 지출과 투자를 확대할 수 있게 된다.
동시에 달러 중심의 제재와 금융 규제에서 벗어나 보다 독자적인 경제운용이 가능해진다. 미국은 이러한 통화의 지위를 바탕으로 막대한 재정지출과 복지 확대를 가능케 했고, 유럽 역시 같은 혜택을 누릴 수 있다는 분석이다.
역사는 기존 질서가 무너지기 전까지는 견고해 보인다는 교훈을 준다. 과거 파운드화에서 달러로 기축통화가 전환된 것처럼, 통화질서의 변화는 조용히 그러나 확실히 진행된다.
현재 유럽은 ‘글로벌 유로’라는 전환점에 서 있다. 라가르드 총재는 이 기회를 유럽의 통화 주권 회복과 통합 강화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유럽이 한목소리로 행동할 수 있다면, 새로운 통화질서의 중심에 유로화가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창우 기자 cwlee@nvp.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