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 자동차 산업, 트럼프 관세정책에 흔들리다
한때 냉전의 철의 장막에 가려졌던 동유럽 국가들이 이제는 세계적인 자동차 제조 중심지로 부상했지만,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고율 관세 정책이 이들의 성공 신화를 위협하고 있다.
월스트리트 저널이 5월 28일 보도한 바에 따르면, 슬로바키아·체코·헝가리 등 동유럽 국가들은 포르쉐와 아우디, 심지어 미국의 픽업트럭에 필요한 핵심 부품까지 생산하며 세계 자동차 공급망의 핵심 축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미국의 수입차에 25% 관세를 부과한 데 이어 유럽연합산 전 제품에 대해 50% 관세를 예고하면서 이 지역의 산업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
특히 슬로바키아는 세계에서 1인당 자동차 생산량이 가장 높은 나라로, 전체 산업 생산의 절반과 대미 수출의 75%를 자동차가 차지하고 있다. 이처럼 자동차 산업 의존도가 높은 경제 구조는 트럼프의 보호무역 조치로 인해 심각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문제는 단순한 수출 타격에 그치지 않는다. 체코와 헝가리 등도 다국적 자동차 브랜드의 부품 공급망에 깊숙이 연결돼 있어, 수요 감소나 생산 이전 결정은 연쇄적인 충격을 야기할 수 있다. 실제로 터키 자동차 내장업체 마타 자동차는 슬로바키아 공장의 일부 생산라인을 관세 혜택이 있는 멕시코로 이전하고 있다.
이 같은 변화는 지역 전반의 투자심리와 생산 전망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슬로바키아에서는 자동차 업계의 미래 생산 기대치가 최근 2년 사이 최저 수준으로 하락했으며, 체코와 헝가리 역시 트럼프 당선 이후 전망이 급격히 나빠졌다.
슬로바키아 중앙은행 총재 페터 카즈밀은 이번 무역 갈등을 “유럽과 미국 간의 궁극적인 대결”로 규정하며 우려를 표했다. 전문가들은 직접적인 피해 외에도 관세로 인한 불확실성이 기업의 신뢰와 투자 의지를 크게 훼손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세계화 시대 최대 수혜자로 평가받던 동유럽 국가들에게 큰 전환점이 될 수 있다. 과거 서방의 대규모 투자와 합리적 노동 비용, 정부의 지원책에 힘입어 급성장한 이들 국가는 이제 글로벌 정치·경제 변수에 크게 흔들릴 수 있는 구조적 취약성을 노출하고 있다.
과거 소련의 라다 자동차를 만들던 공장에서 오늘날 포르쉐와 BMW가 조립되던 성공 신화는 이제 관세와 공급망 재편, 전기차 전환과 같은 다중 압력 앞에서 시험대에 오르고 있다.
이창우 기자 cwlee@nvp.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