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디지털 유로로 통화 주권 수복 시도…달러 지위에 정면 도전
유럽중앙은행(ECB)이 유럽의 금융 자율성을 되찾기 위해 ‘디지털 유로’ 도입에 속도를 내고 있다. 지난 3월 20일 브뤼셀에서 열린 유럽 의회 청문회에서 크리스틴 라가르드 ECB 총재는 “우리 화폐를 방어할 때”라고 강조하며, 독립적인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의 필요성을 강하게 역설했다. ECB는 이어 4월 17일 성명을 통해 디지털 유로 도입을 위한 법적 틀을 신속히 마련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디지털 유로 추진은 단순한 기술적 혁신이 아닌, 통화 주권과 지정학적 경쟁의 핵심 과제로 부상하고 있다. 유럽은 통화 체계 전반에서 여전히 미국에 강하게 의존하고 있다. 1999년 출범한 유로화는 통합 화폐로서의 역할에도 불구하고, 거래 시스템과 결제 인프라 대부분이 미국에 기반하고 있다. 신용카드 시장만 보더라도, 비자카드와 마스터카드가 유로존 내 결제의 3분의 2 이상을 점유하고 있으며, 유럽 13개국 이상이 미국 등 역외 자본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라가르드 총재가 디지털 유로화를 밀어붙이는 배경에는 트럼프 전 대통령 시절의 충격이 자리하고 있다. 트럼프는 공개적으로 유럽을 비판하며 “미군 덕분에 유럽은 평화를 누리면서도 특혜만을 취하고 있다”고 발언했고, 이러한 미국 중심주의는 유럽 내에서 금융 주권에 대한 위기의식을 고조시켰다.
특히 달러는 여전히 국제 통화 체계의 중심에 있다. 2024년 말 기준, 전 세계 외환보유액 중 달러의 비중은 약 60%에 달하며, 이는 유로화의 20%를 크게 앞선다. 비록 달러의 지배력이 점차 줄고 탈달러화 흐름이 감지되고 있지만, 유로화는 아직 대체 통화로 자리매김하지 못했다.
이에 따라 유럽중앙은행은 디지털 화폐 영역에서의 선점을 통해 달러와의 격차를 줄이려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유로존 20개국의 중앙은행은 고위급 협의체를 구성해 디지털 유로의 최종 단계 연구에 돌입했으며, 이전까지 회의적이던 독일과도 긴밀한 조율이 진행 중이다.
디지털 유로가 무역과 소비 분야에서 실질적으로 사용된다면, 미국과 유사한 인구 규모를 가진 유로존의 잠재력이 실현될 가능성이 있다. ECB의 루이스 데킨도스 부총재는 “유럽 통합이 진전되면 유로화가 달러를 대체할 날이 올 것”이라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다. 한스 티트마이어 전 독일연방은행 총재가 말년에 예견한 “달러·유로·위안·엔화의 통화 바스켓 시대”는, 디지털 분야에서 격화되는 미·EU 간 갈등으로 점점 더 요원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은 디지털 유로를 통해 통화 주권을 회복하고, 미국 중심의 글로벌 금융 질서에 균열을 가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고 있다.
이창우 기자 cwlee@nvp.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