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두나물이 숙주나물로 불리게 된 시대적 배경
숙주나물의 이름이 붙여진 유래
오늘은 숙주나물의 이름에 얽힌 일화입니다.
조선 신숙주(申叔舟)도 원래는 충신이었습니다.
반찬 중에서도 가장 잘 쉬어버리는 반찬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녹두나물... 아니, 숙주나물입니다."
그런데 콩으로 싹을 틔운 나물은 콩나물, 메밀로 싹을 틔우면 메밀나물, 산에서 자라는 취나물의 어린 잎을 따서 데친 후 말리면 취나물이라고 하는데 왜 녹두로 싹을 틔운 나물은 녹두나물이라 하지않고 숙주나물이라고 하는지 그 이유를 아시는지요?
녹두로 싹을 틔운 나물을 조선시대 초기까지만 하더라도 녹두나물이라고 불렀습니다.
녹두나물이 숙주나물로 불리게 된 시대적 배경은 이렇습니다.
조선시대 초기 제6대 왕이었던 단종을 단종의 숙부였던 수양대군(후에 제7대 임금으로 즉위하면서 세조가 됨)이 단종을 폐위시킨 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된 단종을 강원도 영월 청령포로 유배시키고, 나중에 사약을 내려 독살까지 시키는 과정에서 조정의 많은 신하들 사이에 치열한 찬반논쟁을 유발하게 됩니다.
이 당시 단종의 폐위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면서 죽음을 무릅쓰고 투쟁한 6명을 역사는 사육신이라 기록하여 오늘날까지도 이들을 추모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성삼문, 박팽년, 이 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는 사육신이고, 김시습, 원 호, 이맹전, 조 려, 성담수, 남효온 등을 생육신이라 부릅니다.
당시에 훗날 사육신이 된 성삼문과 도승지(都承旨:조선시대 승정원의 6승지 중 으뜸 승지)로 있던 신숙주는 절친한 친구였다고 합니다.
승정원은 오늘날 청와대 비서실에 해당하는 기관으로 보면 됩니다. 도승지는 비서실장 격이지요.
쿠테타가 발생한 엄중한 상황에서 성삼문 등 사육신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단종의 폐위를 반대했습니다.
성삼문을 비롯한 단종 옹위파들은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이 규범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판단했었고,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여론의 동정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신숙주도 당연히 동참할 것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수양대군의 끈질긴 회유와 공작에 신숙주는 하루 아침에 왕위 찬탈파의 입장에 서게 되었지요.
요즘 말로 하자면 쿠테타 군에 동조를 한 것입니다.
이를 두고 세인들은 신숙주가 한나절도 못 가서 변하는 녹두나물 같다고 하여 신숙주를 빗대 "숙주나물 같은 놈"이라고 수근대었습니다.
이로인해 녹두나물을 숙주나물로 부르게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만약 신숙주가 당시에 끝까지 왕위찬탈을 반대하는 입장에 서 있다가 죽음을 맞았다면 오늘날 우리는 사육신(死六臣)이 아니라 사칠신(死七臣)이라 불렀을 것이고, 숙주나물도 녹두나물이라는 원래 이름 그대로 불려졌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 봅니다.
그런데 신숙주는 학자로서 그 당시의 시대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역사의 평가는 참 냉정합니다.
하지만 신숙주의 정치적 선택 외에 학문적으로는 훈민정음 창제에 기여하고 후세들에게 교훈이 되는 여러 업적을 남긴 점 등은 평가해야 할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배대열 식품연구가 BDYTYY@nvp.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