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반도체 왕좌 탈환을 꿈꾸다

라피더스, 일본 반도체 부활의 신호탄

2024-12-27     이창우 기자
사진=뉴시스 제공.

일본이 외국 기술과 정부 보조금을 앞세워 반도체 산업의 최전선으로 복귀하려는 야심 찬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독일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일본의 이 같은 노력을 "세계에서 가장 대담하고 리스크가 큰 산업 도박"으로 평가했다.

지난주, 일본 홋카이도의 신치토세 공항에 도착한 네덜란드발 화물기는 일본 반도체 산업의 중요한 이정표를 세웠다. 화물기에는 세계 최첨단 극자외선(EUV) 리소그래피 시스템의 부품이 담긴 컨테이너들이 실려 있었다.

이 장비는 네덜란드 기업 아스맥스(ASML)가 제작한 것으로, 세계에서 가장 정교한 칩 생산이 가능한 시스템이다. 가격은 약 1억8000만 유로(약 2,600억 원), 무게는 71톤에 달해 공항 인근의 새로운 반도체 공장 ‘IIM-1’로 옮겨져 설치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이 시설은 신생 반도체 기업 라피더스(Rapidus)의 공장으로, 내년 봄 시험 생산을 시작할 계획이다. 일본은 대만, 한국, 미국에 이어 네 번째로 아스맥스의 EUV 시스템을 도입한 국가가 되었다. 라피더스의 고이케 준요시 CEO는 공항에서 “홋카이도를 거점으로 세계에 일본산 최첨단 반도체를 공급하겠다”고 선언했다.

1980년대 일본은 세계 반도체 시장의 절반을 차지하며 도시바, 히타치, 후지쓰 같은 거대 기업들이 세계 시장을 주도했다. 그러나 미국, 한국, 대만 등의 경쟁자가 부상하며 일본 반도체 산업은 쇠락의 길을 걸었다. 이제 일본은 라피더스를 통해 다시 정상으로 복귀하고자 한다.

라피더스는 2나노미터(nm) 공정의 첨단 반도체 칩을 생산할 계획이다. 2나노 공정은 머리카락 굵기의 약 25만분의 1 크기로, 손톱만 한 면적에 500억 개의 트랜지스터를 배치할 수 있는 기술이다.

일본은 현재 40나노 공정 기술에 머물러 있지만, 이를 뛰어넘어 2년 뒤에는 2나노 공정을 도입하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목표는 TSMC와 삼성 등 글로벌 리더들이 이미 선점하고 있는 분야에 도전장을 내미는 것이다.

TSMC의 전 연구개발 책임자인 양광레이는 라피더스의 계획을 두고 회의적인 시각을 내비치며 "일본이 직접 2나노 칩을 생산하려 한다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이라고 지적했다.

라피더스는 일본 반도체 산업의 미래를 위한 중심축이 되고자 한다. 하지만 이 회사는 상업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기술과 공급망 단축을 위한 기존 통합 제조 모델로 돌아가는 접근 방식을 채택해 논란을 일으켰다. 일본 정부는 이 프로젝트에 약 230억 유로(약 32조 원)에 달하는 투자가 필요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라피더스 설립의 시작은 2020년 도쿄일렉트로닉스의 동철로 전 사장이 IBM의 존 켈리 3세 사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것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IBM은 새로운 2나노 기술의 생산 파트너를 찾고 있었고, 이를 계기로 라피더스가 탄생했다. 설립 이후 라피더스는 AI 칩 생산과 1.4나노 공정으로의 확장을 계획하고 있으며, 2030년까지 연 매출 60억 유로를 목표로 설정했다.

하지만 일본 3대 금융그룹은 높은 부실 위험을 이유로 대출을 주저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일본 정부는 반도체 부흥 프로젝트의 대부분을 국고로 지원하며, 이를 "국가의 생존이 걸린 전투"로 규정했다.

라피더스는 일본이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다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상징한다. 이 젊은 기업의 성공 여부는 일본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기술 개발, 글로벌 시장과의 경쟁이라는 삼박자에 달려 있다. 야마제 오시로 자민당 의원은 “반도체 산업에서 일본의 재기를 반드시 이루겠다”고 강한 의지를 표명했다.

일본의 야심 찬 도전이 과거의 영광을 되찾는 성공 사례가 될지, 아니면 또 다른 실패로 남을지는 향후 몇 년간의 성과에 달려 있다.

이창우 기자 cwlee@nvp.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