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육사(李陸史) '청포도'... 단순한 서정시가 아닌 독립운동의 몸부림 묘사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7월을 맞으면 신록의 계절을 지나 바야흐로 본격적인 한 여름이 바짝 다가온다.
6월은 호국 보훈의달이다. 해마다 7월이면 잊히지 않고 떠오르는 시가 하나 있다. 단순한 서정시가 아니기 때문이다.
죽는 날까지 <청포도>의 저자 이육사가 꿈꾸었던 것은 오직 하나였다.
조국의 독립이었고, 이에 대한 열정은 그의 시들에 '기다림'의 표현으로 나타나 있다.
시 <청포도>의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올 손님'이라든지, <광야(曠野)>의 '백마 타고 올 초인(超人)'은 1930년대 그가 그토록 오랜 세월동안 애타게 기다려 온 독립된 조국을 상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라를 잃은 슬픔이 얼마나 슬프고 비참하였던지 후손들은 간접적으로만 느낄뿐이다.
일제에 맞서 처절하게 싸웠던 독립운동가로서의 이육사에 대해 많은 분들이 보다 깊은 관심을 가져 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그의 생애를 짧게나마 되짚어 보았다.
내 고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던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 손을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집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 이육사(李陸史) <청포도>
이 시가 지닌 시각적인 효과를 더욱 아름답게 돋보이게 하는 것은 '푸른색'과 '흰 색'의 조화다.
푸른색은 확 뜨인 창공, 자유롭게 훨훨 날수 있는 자유의 공간을 의미하였다고 볼 수 있다. 흰색은 순수한 독립을 위한 지고지선한 열정과 순수한 마음을 담았다고 여겨진다.
'청포도', '하늘', '푸른 바다', '청포(靑袍)''가 나타내는 푸른 색과, '흰 돛단배', '은쟁반', '하이얀 모시 수건'이 상징하는 흰 색의 대비는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시를 읽는 이들에게 한 폭의 수채화처럼 맑고 아름다운 '순수(純粹)'와 '순결(純潔)'을 안겨 줍니다.
이 시로 이육사 시인을 오직 순수한 서정(抒情)을 추구하는 낭만파 시인으로만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는 '낭만'과는 거리가 먼 열렬한 행동파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의열단(義烈團)'의 열혈 단원이었다. 일본 제국주의에 가장 적극적이고 치열하게 맞섰던 독립운동 단체의 행동대원이었다. 그야말로 어둠의 독립전사였다.
이육사가 39년의 짧은 생애 동안 17번이나 감옥을 출입한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이육사'라는 이름이, 1927년 대구은행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할 때, 수인번호 '264'에서 따온 것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온 생애를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몸 바친 열사 였다는 사실을 비교적 많은 이들이 알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독립운동을 하는 동안에도 그의 생활은 아무런 외부의 지원없이 궁핍하기 짝이 없었다.
독립운동을 위해 1943년 베이징에 건너갔던 이육사는 그 해 돌아가신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귀국했다가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었다.
피체(被逮) 후 중국 베이징 형무소로 이감되어 대나무로 살점을 도려내는 등의 참혹한 고문을 받다, 결국 1944년 1월 16일 39세를 일기로 그곳에서 순국(殉國)하고 만다.
이토록 애달프게 기다리던 조국의 독립을 못 본채 먼 이역 땅에서 외롭게 숨져간 이육사의 유해는 1960년 그의 고향 안동에 이장되어 비로소 독립된 조국에서의 안식을 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