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 최고 권력자였던 조조(曹操)와 전설적인 명의 화타
오늘은 전설적인 명의였던 화타의 이야기를 펼칩니다.
고대 중국에는 걸출한 의사 두 분이 계셨습니다.
주(周) 왕조시대의 인물인 편작(扁鵲)과 한(漢)나라 말기에 이름을 떨쳤던 화타(華陀)가 바로 그들입니다.
오늘은 화타 선생에 대해 짚어 보겠습니다.
화타 선생은 정확히 언제 태어났는지 확실한 기록이 없습니다.
그는 현재의 중국 안휘성에서 태어났습니다.
화타가 중국의 역사 속에서 가장 뛰어난 명의(名醫)로 추앙받는 이유는 약, 침, 뜸 등 한의학 전반에 걸쳐 정통했을 뿐 아니라 인체를 마취시켜 외과수술을 처음으로 시행한 의사였기 때문입니다.
그가 개발한 마비산(麻沸散)은 오늘날의 마취제와 비슷한 개념의 약물이었는데 외과적 수술이 필요한 환자들을 수술 전에 마취시켜 통증을 느끼지 못하도록 만든 획기적인 약물이었습니다.
화타는 양생술에도 밝아서 100세 가까운 나이에도 장년의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화타가 명의로 이름을 떨치자 동향 출신의 당대 최고 권력자였던 조조(曹操)가 화타를 자신의 곁에 두고 병을 돌보게 했습니다.
조조는 당시 심한 두통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화타는 조조에게 두통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예리한 칼로 머리를 갈라 환부를 도려내는 수술을 해야한다고 했지만 조조는 화타가 자신을 죽이려는 수작을 펴는 것으로 오해하고 화타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이 때부터 화타는 조조의 곁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굳힙니다.
어느날 화타는 얼마 동안의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는 부인의 병을 핑계로 조조의 부름이 계속되었음에도 가지않고 버텼습니다.
꾀돌이 조조가 화타의 뒷 조사를 해 보았더니 화타의 부인은 멀쩡하게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화가 치민 조조는 불경죄로 화타를 잡아와서 감옥에 가두고 심한 고문을 가한 뒤 사형을 시키라고 명합니다.
이 시점에 조조가 무척 아끼던 아들이었던 조충(曹沖)이 중병에 걸려 목숨이 경각(頃刻)에 이르렀습니다.
다급해진 조조가 형장으로 사람을 보내 화타의 사형을 멈추라고 했으나 화타는 이미 사형 집행이 끝난 후였습니다.
조조의 아들 충(沖)도 화타가 사형을 당한 그날 12살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 일이 있은 뒤 조조는 땅을 치고 후회를 했습니다.
화타는 오금희(五禽戲)라는 운동법을 창안하여 양생술을 가르쳤는데 팔, 다리의 관절을 여러 방향으로 움직여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함으로써 늙음을 방지하는 방법이었는데 그 시대에 큰 반향을 일으켰던 것 같습니다.
시대를 풍미했던 거인(巨人)은 갔지만 그가 남긴 족적(足跡)은 후학들의 본보기가 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