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김세웅 전 무주군수와 유종근 전 전북도지사의 공적
민선 8기를 거치는 동안 도내지역의 시장.군수.도지사들이 지역을 위한 노력을 많이 해 왔습니다.
필자는 지난 1월에 유종근 전 전북도지사의 공적과 평가에 대해서 올려 드렸습니다.
유종근 전 도지사는 비록 불미스러운 일로 불명예 퇴진을 하였지만 재임 기간동안 괄목할만한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당시 호남에는 광주에만 월드컵경기장을 신축한다는 정부의 방침이 결정되자 유종근 전도지사는 김대중 당시 대통령을 찾아가 우리 전주에도 "월드컵 경기장이 필요합니다"
"전주는 낙후되고 번번한 체육시설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대통령님 우리 전북도민들을 위해서 월드컵경기장이 꼭 필요합니다"
"우리 전북도민들도 우리 지역에서 월드컵축구 경기를 꼭 보고싶습니다"
"제가 그동안 대통령님을 모셨지만 이제 제가 전북 도지사가 된 이상 도민들을 위하여 모시고 섬겨야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님 제가 무슨 일이든 할 테니 전주에도 월드컵 경기장이 신축될 수 있도록 간절히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하여 유종근 전 전북도지사의 간절하고도 호소력있는 설득에 마침내 김대중 대통령은 허락을 하였던 것 입니다.
우리전북과 도세가 비슷한 충북의 도청소재지 청주시는 그 사실을 알고 강한 유치전을 벌였지만 유종근 전 도지사만큼의 열정과 노력이 부족 하였습니다.
결국 월드컵경기장은 서울.부산.대구.인천.수원.대전.광주.울산.전주.제주등 전국에 10개도시로 결정되었고 전주월드컵 경기장 신축은 유종근 전 전북도지사의 크나큰 업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소리문화전당유치. 화산체육관신축. 빙상경기장신축. 무주태권도원유치. 군산.남원의료원 신축. 투자와 관련하여 당시 미국의 세계적인 톱 가수 마이클 잭슨까지 무주로 초청하였고 현 도청의 이전 부지까지 결정하는 눈부신 성과와 공적을 남겼습니다.
20여년이 흐른 지금 전주와 전라북도는 무엇이 어떻게 달졌는지 한번 생각 해 보십시요.
아무리 둘러보아도 아파트만 늘어났을 뿐 새롭게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도민들의 삶과 질을 높일 수 있는 문화와 환경은 특별히 달라지지 않았고 측근정치 보은정치등 사사로움만 남았을 뿐이고 전북의 시계는 멈추어 있습니다.
이제 그 시계의 초침을 힘차게 돌릴 수 있도록 해야합니다.
지난 업적과 공적은 역사가 평가합니다.
필자는 민선 8기를 맞이하여 도내 역대 일 잘하는 지도자를 새롭게 조명하고 그분들의 잘한 업적들에 대해서는 새롭게 부각하여 지도자들이 타산지석으로 삼았으면 하는 마음과 도민들이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는 널리 알리어 기리기 위함입니다.
오늘은 도의원과 무주군수 3선을 지내고 덕진구 국회의원을 지내신 "작은거인 불도저" 김세웅 전 무주군수를 소개하는 글을 2탄에 걸쳐 올려드립니다.
1탄.
"발로뛰는 중졸의 군수님"
어이 김군ᆢ!
안성면에 출장 가야되니 구두 닦는데로 빨리 ○○과로 가져다주렴ᆢ!
"네ᆢ계장님 알겠습니다" "후딱 닦아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그 대신 "물광"은 시간이 없어 안됩니다"ᆢ
"야 임마" 그래도 파리가 낙상할 수 있도록 닦아와야지"ᆢ
"딱 5분 준다"ᆢ!
계장님!ᆢ 지금 ○ ○과장님것도 밀려있고 또 배달도 해야합니다ᆢ!
그러니 10분내로 해 드리겠습니다.
알았어ᆢ 임마~!
빨리 닦아서 가져와 ᆢ!
김세웅 전 군수는 청년 시절 무주군청에서 군 복무요원으로 근무할 때의 일화입니다.
당시에는 군 복무요원들에게 무기고에서 총기닦이및 청소 그리고 구두닦이 일 등 잡다한 일 들을 주로 전담하게 하였습니다.
어려서부터 머리가 똑똑하고 바른 청년이었던 김세웅은 당시의 군청 직원들에게 인기도 많았지만 한편으로는 많은 무시와 설움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중략.
1953년 김세웅 전 무주군수는 가정형편이 어려운 가운데 무주중학교를 졸업하고 여러직업을 전전하다 방송통신고등학교와 한국방송통신대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그것도 가난때문에 또래보다 2년 늦게 중학교에 입학하였고 제대로 학교를 다닌것은 중학교가 마지막이었습니다.
무주중학교를 졸업하고 명문 전주고등학교 입시에 낙방하면서 그때부터 막노동을 전전하였습니다.
당시에 안 해본 직업이 없을정도로 소위 노가대와 시내버스 조수. 고압가스기사. 냉동기술사등의 수 많은 직업들을 전전하였습니다.
세상의 온갖 풍파를 헤치고 성실하게 살아온 청년 김세웅은 어느 덧 전북도의원을 거쳐 초대 민선 1기 무주군수로 당당하게 당선되었습니다.
세상의 온갖 고생끝에 얻어진 값진 결과였기에 ᆢ
"초심을 잃어서는 절대안된다" "그동안의 고생과 설움을 안겨준 사람들에게 절대로 보복하지 않고 청렴하고 깨끗하게 군정을 이끌어야 한다는 마음속의 굳은 결의를 다졌습니다.
군수에 취임하자 "방 여섯 개가 딸린 호화 주택인 군수가 기거할 수 있는 관사"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김세웅군수는 분수에 맞지않는 호화주택은 부담스럽다며 관사 대신에 보증금 1천만원에 월 20만원의 셋방살기를 고집 하였습니다.
이는 육체와 정신적으로 편안해지면 그동안 고생고생 하면서 마음속에 간직해왔던 약자와 가난한 사람들의 대변자로서의 문제의식이 희미 해 질까 두려워 선택한 결단이었습니다.
군수에 취임한 어느 날 군청내 모과장이 군수실을 노크하며 들어왔습니다.
이형권 칼럼니스트 leehyung@nv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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