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비전e] 아내는 2016년에 하늘나라로 갔다. 아흔여섯에 떠났으니 장수한 것은 틀림없고 문상객들은 ‘호상(好喪)’이라고 위로했지만 나에게는 인생에서 가장 슬픈 날이었다. 80년을 해로했어도 이별은 아픔이다. 사랑이 긴 만큼 이별의 슬픔도 큰 것이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 한다. 학계를 위해, 업계를 위해, 나라를 위해 큰 업적을 남겼다고들 한다. 그런 찬사를 들을 때마다 나는 부끄러워진다. 과찬이기도 하지만 그 성공은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를 위해 평생 헌신한 아내의 것이다. 나의 성공은 오직 하나, 아내라는 좋은 사람을 만난 것이다.

“남편은 ‘남 편’만 들어 남편이고, 아내는 ‘안에’서 속이 썩어 아내”라는 우스갯소리는 우리 부부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어쩌면 아내는 내가 대문 밖을 나갈 때마다 퇴근할 때까지는 내 남편이 아니라 ‘기업의 남편’, ‘대학의 남편’, ‘나라의 남편’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광준이 내외와 함께한 설악산 여행

공직에서, 학교에서, 기업에서 내게 주어진 임무보다 몇 배를 더 수행해야 하고 어려운 사람을 보면 지나치지 못하는 ‘고질병’ 때문에 아내는 집에서 그 뒷바라지를 다해야 했다. 이웃들에게 관심을 쏟는 동안 아내가 6남매를 돌보고 아이들의 미래를 걱정하느라 노심초사했던 것을 나는 얼마나 이해하고 있었던가. 내가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만큼 아내를 배려했던가. 내가 문경으로, 영월로, 동해로, 덴마크로, 서독으로, 인도네시아로 장기출장을 다니는 동안 아내는 자식들 뒷바라지를 하며 나보다 더 힘든 여정을 헤쳐 나가야 했을 것이다.

나의 이타심이 아내에겐 야속함으로 느껴질 수 있었음을 나는 헤아리지 못했다. 아내를 믿었기 때문에 그랬다는 것은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아내는 전쟁 중에 배려와 기지로 나의 목숨을 두 번이나 구해준 은인이기도 하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아내가 없었다면 나도 없었을 것이다. 내가 우리나라 산업을, 경제를 키웠다고들 하지만 아내가 아이들을 이토록 잘 키워내지 못했다면 나는 바깥일에 그토록 열중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의 열정은 아내의 헌신이라는 에너지로 식지 않았음을 나는 인정하고 고백해야 한다.

나는 늘 드러나는 일을 했지만, 아내가 하는 일은 늘 당연한 것으로 묻혔다. 그러므로 우리집에 있는 모든 상패와 상장은 내가 받을 것이 아니라 아내에게 주어야 마땅하다.

아내가 세상을 떠나기 몇 해 전 광준이 내외가 나와 아내에게 여행을 가자고 했다. 당시 아내는 몸이 많이 쇠약해지고 시력을 거의 잃었고 기억력도 극도로 나빠진 상태였다.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부축해서 걸을 수 있을 때 여행을 한번 하자고 해서 2박3일 일정으로 설악산에 다녀왔다.

나는 앞이 보이지 않는 아내를 위해 설악산의 풍경을 들려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속초에 들렀다. 큰아들 내외가 오징어를 사서 차로 돌아왔는데 아내가 가방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손가락을 눈 삼아 무언가를 한참 찾다가 갑자기 울먹이듯 내게 말했다.

“광준아부지, 나는 왜 돈이 없지? 한 푼도 없네. 얘들 돈 좀 주어야 하는데…… 광준아부지가 얘들 돈 좀 주어요. 네?”

그 소리를 듣고 큰며늘아기가 눈물을 흘렸다. 구십 노모가 칠십을 바라보는 아들며느리에게 용돈을 주지 못해 저리 안타까워하다니!

기억이 흐려진 다음에도 지난 세월 모성애가 본능적으로 나왔다고 생각하니 내가 무슨 죄인이라도 된 것 같았다. 정작 울어야 할 사람은 큰며늘아기가 아니라 나였다.

나는 평생 내 주머니에 들어 있는 돈을 내 돈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집에서 알뜰살뜰 6남매를 키운 아내는 그런 ‘남 편’이 얼마나 야속하고 속상했을까 생각해 보면 미안하기 짝이 없다.

‘펄펄 날던 아내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설악산 여행은 아내와의 마지막 여행이 되었다. 아내는 건강이 점점 나빠졌고 다시는 나들이를 할 수 없게 되었다. 미국에 사는 아이들은 가능하면 서로 다른 때 나와 우리를 보고 갔다. 그나마 내가 건강해 아내 곁에 있을 수 있어서 감사했다.

언젠가 인터뷰 중에 “사모님께서 하루만 살아 돌아온다면 무엇을 해주고 싶으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나는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해 그냥 이렇게 대답했다.

“그 사람이 원하는 거면 뭐든 해주어야지.”

아내가 하루만이라도 살아온다는 것을 상상해 본 적이 없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아내가 생전에 정말로 무엇을 좋아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라는 것이 맞을 것이다. 아내는 평생 내가 원하는 것을 해주었고, 나는 그저 당연하게 받기만 했다.

아내는 나보다 두 살 어리니 나보다 2년은 더 살아야 공평했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외롭고 그리운 것을 보면 아내가 나보다 먼저 떠난 것이 불행 중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내가 먼저 떠나고 아내가 남았다면 이 외로움과 그리움을 아내에게 남겨주었을 테니까. 그것은 더욱 미안한 일이다.

아내는 틀림없이 천국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평생을 가족을 위해 헌신하며 살았고, 늘 감사하며 기도하는 삶을 살았으니 말이다. 천국에서도 생전에 그랬던 것처럼 나와 자식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을 것이다.

77년 전 처음 본 아내의 얼굴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던 수줍은 아가씨는 아직도 나를 설레게 한다. 같은 달, 같은 날에 태어났음을 서로 신기해하며 운명 같은 만남에 설레던 그 순간이 나에게는 영원이다.

나는 가끔 세 딸의 얼굴에서 아내의 얼굴을 찾곤 한다. 부부는 닮는다고 하는데 우리는 76년을 함께 살았으니 더 많이 닮았을 것이다. 거울 속 내 얼굴에서도 아내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까.

나도 이제 기억이 자꾸 희미해지는 것 같다. 더 늦기 전에, 나의 기억이 다하기 전에 아내에게 말해주어야 한다. 정말 미안하고 고마웠다고. 그리고 사랑한다고. 나의 사과와 감사와 사랑이 천국에 있는 아내에게 전해질 수 있으면 더 바랄 게 없다.

75년(금강혼) 넘게 해로한 우리의 사랑은 다이아몬드보다 아름답고 단단하다. 마음이 기억하는 한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아내도 그렇다.

◆ 남기동 선생은...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100살이다. 일본 제6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신생 이공학부 응용화학과에 편입했다. 1946년 중앙공업연구소 지질광물연구소장, 요업 과장으로 근무하며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 등에도 출강했다. 부산 피난 중에도 연구하며 공학도들을 가르쳤다. 6·25 후 운크라 건설위원장을 맡아 1957년 연산 20만 톤 규모의 문경시멘트공장을 건설했다. 화학과장, 공업국 기감(技監)으로 인천판유리공장, 충주비료공장 등 공장 건설 및 복구사업을 추진했다. 1960년 국내 대학 최초로 한양대에 요업공학과를 창설하고 학과장을 맡았다. 1962년 쌍용양회로 옮겨 서독 훔볼트의 신기술 ‘SP킬른(Kiln)’ 방식으로 1964년 연산 40만 톤 규모의 영월공장을 준공했는데, 최단 공사기간을 기록해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영월공장 준공으로 우리나라는 시멘트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1968년 건설한 동해공장은 단위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공장 증설을 거듭해 1992년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량은 세계 5위가 되었다. 1978년 동양시멘트로 자리를 옮겨 2차 오일쇼크 때 시멘트 생산 연료를 벙커씨유에서 유연탄으로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 특허 대신 공개를 택해 업계를 위기에서 살려냈다. 이 공적으로 1981년 '3·1 문화상(기술상)'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 요청으로 1992년 인도네시아 최초의 시멘트공장인 '시비뇽 시멘트플랜트(P.T. SEMEN CIBINONG)'를 건설했다. 한국요업(세라믹) 학회, 한국화학공학회, 대한화학회등 3개 학회, 대한요업총협회(지금의 한국세라믹총협회) 회장으로 학계와 산업계의 유대를 다졌다. 학교, 연구소, 산업체가 참석하는 '시멘트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를 조직해 학술교류는 물론 민간교류에도 힘썼다. 세라믹학회는 그의 호를 따 장학지원 프로그램인 '양송 상'을 제정했다. 1993년 인하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2006년 서울대 설립 60돌 기념 '한국을 일으킨 60인' 상, 2007년 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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