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비전e] 나의 취미는 일이었다. 이렇게 얘기하면 취미가 없이 일에 중독된 사람처럼 생각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에게도 몇 가지 취미가 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함께 우표수집을 했고, 틈이 날 때마다 기원에 나가 바둑을 두기도 했으며, 줄넘기와 걷기도 좋아서 날마다 했으니 그런 운동 역시 취미라면 취미다.

취미가 일이라고 한 것은 취미도 일처럼 열심히 했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일도 취미처럼 즐겁게 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취미를 일처럼 열심히 했으니 평생 모으고 정리한 것이 내 서재를 가득 메우고 있고, 바둑도 어지간한 아마추어는 이길 만큼 프로급(3단)이 되었고, 줄넘기도 하루 1,000번 이상, 걷기도 최소 4킬로미터 넘게 해 나의 다리는 무쇠처럼 단단해졌다.

수집과 정리는 취미를 넘어 습관으로 굳어져 버렸다. 앨범만 30권이 넘는다. 대학에서 강의할 때 꼼꼼하게 볼펜으로 꾹꾹 눌러 깨알같이 기록해둔 강의노트도 100권은 족히 될 것이다. 그것들은 개인적인 학술일기이기도 하지만, 대한민국 요업공학의 역사이기도 하다.

경성제대 응용화학과 1기 졸업생으로 한국인은 나를 포함해 두 명뿐이었으니 그 후 연구소, 대학, 학회, 협회, 심포지엄에서 이루어진 요업공학의 이론과 실무의 기록은 사실상 대한민국 요업공학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내가 기록해두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내용도 많았으므로 사명감을 가지고 부지런히 기록하고 정리해두었다.

실제 전쟁도 겪었지만, 내가 몸담은 공직, 학계, 업계도 전장 같은 현장이었으니 어쩌면 나에게는 ‘난중일기’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지금은 빛이 바래고 낡은 종이뭉치처럼 보이는 그 기록들이 당시에는 후학을 양성하고 기술을 발전시키는 데 적잖은 기여를 했다고 자부한다.

바둑 3단 인증서

바둑은 집중과 몰입을 통해 복잡한 세상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좋은 취미다. 인도네시아에서 시멘트공장을 건설할 때 무더위가 기승을 부려 한낮에는 휴식을 취했는데, 그 시간에 나는 바둑을 두면서 더위를 잊었다. 남들은 잠을 자거나 등목을 하지, 왜 머리 아프게 바둑을 두느냐고 했지만 그건 모르는 소리다. 바둑에 푹 빠지면 더위도, 여기저기 몸이 쑤시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다.

줄넘기와 걷기도 일정 시점이 지나면 내가 줄넘기를 하고 있는지, 걷고 있는지조차 잊을 정도로 몰입하게 된다.

취미도 그렇게 몰입할 때 진짜 취미가 된다. 몰입할 때가 가장 즐겁고 행복한 것이니 취미도 일삼아 열심히 해야 한다. 그래서 나에게는 취미도 일이라고 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에게는 공부나 일도 그런 몰입이 있는 취미였다. 공부든 일이든 몰입하면 취미처럼 즐거움을 느꼈다. 누가 시켜서 억지로 공부하거나 일을 한 것이 아니다. 1등을 하기 위해 공부한 것이 아니라 공부에 몰입하면 즐거워서 더 몰입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1등을 했다. 일도 월급을 많이 받기 위해서, 진급하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니라 내가 공부한 요업이 좋아서, 그 일에 몰입하는 것이 즐거워서 부지런히 하다 보니 성과가 나온 것이다.

“잘하는 사람은 열심히 하는 사람을 당할 수 없고, 열심히 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당할 수 없다”는 말에 나는 절대적으로 동의한다. 공부도 일도 취미처럼 즐기며 몰입할 줄 아는 사람이 최고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행복이란 것도 그런 것이 아닐까. 몰입하면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다. 지금 하고 있는 것에 몰입하지 못하니까 자꾸 딴생각이 나거나 불평불만이 생겨 스스로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내가 요업, 그중에서도 시멘트 분야에서 70년 넘게 외길을 걸어올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몰입의 기쁨’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한다. 그것 말고는 별로 신경 쓰거나 관심이 가는 일이 없었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이나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에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나에게 유일한 취미는 당시 내가 하고 있는 일이었으므로 완전 몰입할 수 있었다. 몰입은 나에게 기쁨을 가져다주었고, 성과도 만들어 주었다.

내가 하는 일을 취미로 삼고 몰입하면 성과도 있고 행복 도 얻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 내가 살아오면서 깨달은 행복론이다. 일을 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하며 매사에 최선을 다하고 하루하루 부지런히 사는 것이 바로 성공이고 행복이 아닐까 한다.

◆ 남기동 선생은...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100살이다. 일본 제6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신생 이공학부 응용화학과에 편입했다. 1946년 중앙공업연구소 지질광물연구소장, 요업 과장으로 근무하며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 등에도 출강했다. 부산 피난 중에도 연구하며 공학도들을 가르쳤다. 6·25 후 운크라 건설위원장을 맡아 1957년 연산 20만 톤 규모의 문경시멘트공장을 건설했다. 화학과장, 공업국 기감(技監)으로 인천판유리공장, 충주비료공장 등 공장 건설 및 복구사업을 추진했다. 1960년 국내 대학 최초로 한양대에 요업공학과를 창설하고 학과장을 맡았다. 1962년 쌍용양회로 옮겨 서독 훔볼트의 신기술 ‘SP킬른(Kiln)’ 방식으로 1964년 연산 40만 톤 규모의 영월공장을 준공했는데, 최단 공사기간을 기록해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영월공장 준공으로 우리나라는 시멘트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1968년 건설한 동해공장은 단위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공장 증설을 거듭해 1992년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량은 세계 5위가 되었다. 1978년 동양시멘트로 자리를 옮겨 2차 오일쇼크 때 시멘트 생산 연료를 벙커씨유에서 유연탄으로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 특허 대신 공개를 택해 업계를 위기에서 살려냈다. 이 공적으로 1981년 '3·1 문화상(기술상)'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 요청으로 1992년 인도네시아 최초의 시멘트공장인 '시비뇽 시멘트플랜트(P.T. SEMEN CIBINONG)'를 건설했다. 한국요업(세라믹) 학회, 한국화학공학회, 대한화학회등 3개 학회, 대한요업총협회(지금의 한국세라믹총협회) 회장으로 학계와 산업계의 유대를 다졌다. 학교, 연구소, 산업체가 참석하는 '시멘트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를 조직해 학술교류는 물론 민간교류에도 힘썼다. 세라믹학회는 그의 호를 따 장학지원 프로그램인 '양송 상'을 제정했다. 1993년 인하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2006년 서울대 설립 60돌 기념 '한국을 일으킨 60인' 상, 2007년 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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