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시멘트산업의 살아있는 역사] 남기동 회고록(66) 웃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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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시멘트산업의 살아있는 역사] 남기동 회고록(66) 웃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 남기동
  • 승인 2019.06.2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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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비전e] 나의 고향인 평양에는 ‘장대현(章臺峴)교회’라는 역사적인 교회가 있었다. 1893년 선교사 모펫(Moffett, S. A.)이 널다리(板洞)에 세운 회당으로 처음에는 ‘판동’ 또는 ‘널다리교회’라고 했다. 그 후 1899년 장대현(장대재)교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장대현교회로부터 강서 탄포리교회, 청산포교회, 대동군 태평외리교회, 중화군 읍내교회 등이 파생하면서 장대현교회는 서북계 신앙의 발상지가 되었다. 1899년 병인양요 때 활약한 박춘곤(朴春坤)이 세례를 받으면서 신도가 급증해 헌금과 선교사 보조금으로 장대현에 72칸의 교회당을 1900년 준공했다.

장대현교회 성가대. 1935

그 장대현교회를 이끌어가는 장로 중 한 분이 바로 나의 장인어른이셨다. 그런데 나 때문에 장인어른과 장모님을 비롯해 처가 집안 전체가 곤란에 빠지게 된 일이 있었다.
당시 장대현교회의 규율로는 비(非)기독교 집안과 혼인할 경우 배우자를 전도하지 않으면 교회에서 받은 직분이 정지되는 것은 물론이고 교회에도 나올 수 없었다.

그것은 장인어른과 처가 식구들에게 너무나도 가혹한 형벌이었다. 장인은 물론 장모님도 신앙생활이 중단되었다. 아내는 엄청난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나에게 어떤 얘기도 하지 않았다.

우리집은 대대로 유교집안이었기 때문에 당시 분위기로는 사돈 집안은 물론이고 사위인 나에게도 기독교 신앙을 선뜻 권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나 역시 그런 엄청난 곤란이 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사람에게 그런 사실을 전해 듣고 나는 큰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장인어른, 장모님께 죄송하고 아내에게도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부모님께 이 사실을 말씀드리고 “아무래도 교회에 나가야겠다”는 말을 꺼낼 용기가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근심 가득한 아내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괴롭기 짝이 없었다.

절대로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자는 것이 내가 어릴 적부 터 지켜온 생활신조인데 정작 남도 아닌 아내와 처부모님께서 나 한 사람 때문에 곤혹스러워한다는 사실에 나는 죄인이 된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주일, 아침 일찍 눈을 떴다. 나에게 시집 온 뒤로 교회에 가지 못하는 아내는 그날 아침도 부모님과 하나님께 죄스런 마음으로 밥을 짓고 있었다.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교회 다니는 게 뭐라고 내가 장인어른, 장모님과 아내를 이렇게 힘들게 만들고 있는가?’

그렇게 자책하며 답답한 마음에 집을 나섰는데, 어느 순간 놀랍게도 발걸음이 나도 모르게 장대현교회 쪽으로 향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웅장한 장대현교회가 눈앞에 나타나자 나는 덜컥 겁이 났다.

보통학교 시절 교회유치원에 다닌 이후로 교회에 가본 적이 없던 나는 무척이나 낯설었다. 하지만 무엇에 이끌려 왔든 여기까지 와서 되돌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 한번 들어가 보자!’

예배가 시작된 지 조금 지난 후여서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 맨 뒷자리에 홀로 앉았다.

철들고는 처음 교회에 간 것이어서 낯설고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기도합시다” 하면 앞 사람들이 하는 대로 고개를 숙이고 손을 모았다. “찬송합시다” 하면 입만 뻐끔거리며 노래 부르는 시늉을 했다. 성가대의 합창이 끝나고 목사님께서 설교를 시작했다. 누가 알아볼까 긴장한 탓에 무슨 내용인지 귀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 나는 속으로 ‘들어갈 때 그랬던 것처럼 설교가 끝나자마자 어서 교회를 빠져나오리라’ 마음먹었다. 예배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나오면 필시 사람들과 마주칠 테고 그건 아주 난처한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의 계획은 목사님의 한마디에 무산되고 말았다. 설교를 마친 목사님이 갑자기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오늘 새로운 신자가 있어 소개하고자 합니다.”

사실 그때까지도 나를 두고 하는 말씀인 줄은 생각도 못했다. 다음 말씀이 나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저 맨 뒷자리에 계신 성도분, 앞으로 잠시 나와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앞에 앉아 있는 교인들이 일제히 뒤를 돌아보았다. 수많은 시선이 향한 곳은 바로 나였다.

나는 얼떨결에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아갔다.

“반갑습니다. 본인 소개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네, 저는……”

모두 내 입만 쳐다보고 있었다. 용기를 내어 입술을 뗐다.

“저는 황금동에서 온 남기동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누군가 큰소리로 말했다.

“아! 박기봉 장로님의 사위가 아니시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네, 저의 장인어르신이 맞습니다.”

성도들은 박수로 나를 환영해주었다. 박수소리에는 이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부모님께 이 사실을 알렸고, 다행히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그 후 나는 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80년이 지난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장대현교회는 1946년 3·1절기념예배를 둘러싸고 신도들이 공산정권에 항거한 사건으로 큰 박해를 받았다. 장대현교회를 비롯해 이북에 있는 교회에 다니다 월남한 신도들은 남쪽에 교회를 개척했다. 그중 대표적인 곳이 남산 밑 회현동에 있는 성도교회다. 성도교회의 역사도 어느덧 70년이 훌쩍 넘었다. 해방 후에는 우리 가족 모두 성도교회에 다녔다. 나는 집사 직분으로 지금도 주일이면 어김없이 교회에 간다. 교회에서도 내가 최고령이다.

언젠가 미국 로체스터에 있는 광준이네 집을 방문했을 때 많은 교인을 집으로 초대해 저녁식사를 함께 한 적이 있는데, 목사님께서 나에게 “좋은 말씀을 한마디 해달라”고 해서 나의 레퍼토리 중 하나를 얘기했다.

“우리집에는 세 가지 상비약이 있습니다. 파리약, 구두약, 치약이 그것입니다. ……”

내 이야기가 끝나고 박수도 많이 받았는데, 광준이가 원망 섞인 투로 말했다.

“아버지, 성도들한테 하는 것인데 기왕이면 신앙에 관련된 말씀을 좀 해주시지 그러셨어요. 상비약 얘기는 좀 ……”

듣고 보니 괜히 미안했다. 내 딴에는 성도들이 건강하게 오래 살아 신앙생활을 더 열심히 하라는 뜻으로 한 덕담인데, 듣기에 따라서는 다소 실망스러울 수도 있겠다 싶었다.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내 스피치에 다소 문제가 있었음을 시인했더니 누군가 아주 훌륭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럼 다음부터는 우리집에 상비약이 ‘세 가지’가 아니라 ‘다섯 가지’라고 하십시오. 파리약, 구두약, 치약, 그리고 구약과 신약이 있다고 말입니다.”

모두 한참을 웃었다. 웃고 기도하고 사랑하는 것, 그것이 신앙이다.

6남매와 사위, 며느리 대부분이 미국에 흩어져 살고 있지만 저마다 목사, 장로, 권사의 직분을 받아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또 한인회장 등을 맡아 지역사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감사하고 있다.

기독교인으로서 나의 생활신조는 성실, 겸손, 사랑이다. 늘 나의 작은 재능과 물질을 사회에 환원하는 게 도리라고 생각해 왔다. 회현동 성도교회에, 하나님 나라로 가기 전까지 권사 직분으로 봉사한 아내 명의로 40억 원대 헌금을 기탁하기도 했다.

◆ 남기동 선생은...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100살이다. 일본 제6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신생 이공학부 응용화학과에 편입했다. 1946년 중앙공업연구소 지질광물연구소장, 요업 과장으로 근무하며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 등에도 출강했다. 부산 피난 중에도 연구하며 공학도들을 가르쳤다. 6·25 후 운크라 건설위원장을 맡아 1957년 연산 20만 톤 규모의 문경시멘트공장을 건설했다. 화학과장, 공업국 기감(技監)으로 인천판유리공장, 충주비료공장 등 공장 건설 및 복구사업을 추진했다. 1960년 국내 대학 최초로 한양대에 요업공학과를 창설하고 학과장을 맡았다. 1962년 쌍용양회로 옮겨 서독 훔볼트의 신기술 ‘SP킬른(Kiln)’ 방식으로 1964년 연산 40만 톤 규모의 영월공장을 준공했는데, 최단 공사기간을 기록해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영월공장 준공으로 우리나라는 시멘트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1968년 건설한 동해공장은 단위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공장 증설을 거듭해 1992년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량은 세계 5위가 되었다. 1978년 동양시멘트로 자리를 옮겨 2차 오일쇼크 때 시멘트 생산 연료를 벙커씨유에서 유연탄으로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 특허 대신 공개를 택해 업계를 위기에서 살려냈다. 이 공적으로 1981년 '3·1 문화상(기술상)'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 요청으로 1992년 인도네시아 최초의 시멘트공장인 '시비뇽 시멘트플랜트(P.T. SEMEN CIBINONG)'를 건설했다. 한국요업(세라믹) 학회, 한국화학공학회, 대한화학회등 3개 학회, 대한요업총협회(지금의 한국세라믹총협회) 회장으로 학계와 산업계의 유대를 다졌다. 학교, 연구소, 산업체가 참석하는 '시멘트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를 조직해 학술교류는 물론 민간교류에도 힘썼다. 세라믹학회는 그의 호를 따 장학지원 프로그램인 '양송 상'을 제정했다. 1993년 인하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2006년 서울대 설립 60돌 기념 '한국을 일으킨 60인' 상, 2007년 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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