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시멘트산업의 살아있는 역사] 남기동 회고록(64) 우리만 모르는 도자기의 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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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시멘트산업의 살아있는 역사] 남기동 회고록(64) 우리만 모르는 도자기의 神
  • 남기동
  • 승인 2019.06.2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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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비전e] 1960년대 우리 요업계는 도자기, 유리, 내화물, 연마재, 시멘트 등 이른바 굴뚝산업인 고전 요업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것이 지난 60년 사이 고전 요업과 신요업(파인 세라믹)이 조화를 이루면서 수입대체산업에서 수출산업으로 발전했다. 오늘날에는 첨단 신소재 개발로 중화학공업에서 전자정보산업에 이르기까지 모든 산업을 뒷받침하는 소재산업으로 발전했다.

1960년대 초 시멘트공장은 동양시멘트와 운크라의 원조로 건설된 대한양회 등 2개 사(2개 공장)뿐이었고 생산량은 50만 톤밖에 안 되었다. 한양대 요업공학과 졸업생이 배출된 1964년에는 쌍용, 한일, 현대 3사의 신설로 5개 사 (5개 공장)로 늘었고, 생산량은 100만 톤을 넘어서 우리나라는 시멘트 수입국에서 수출국으로 전환되었다.

‘도자기의 조상(陶祖)’ 이삼평을 기리는 도조제에서.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아세아, 성신 2개 사 신설로 6개사(8개 공장)로 늘어 생산량은 600만 톤을 육박했고, 1980년대에는 고려시멘트의 신설로 7개 사(10개 공장)로 되고 기존 시멘트기업의 공장도 증설되어 생산량은 2,500만 톤으로 늘었다. 1990년대에는 한라시멘트의 신설로 8개 사(11개 공장)로 되고 6,000만 톤에 이르는 시멘트를 생산했다. 슬래그시멘트, 백시멘트 등 특수시멘트공장도 건설되었다.

양적 성장뿐 아니라 품질 개선, 품종 다양화, 공정 개선으로 생산성과 국제경쟁력도 향상되었다. 이제 우리 시멘트산업은 최신 설비와 기술을 겸비한 시멘트대국의 반열에 들어섰다.

디스플레이용 면유리도 신소재다. 1960년 이전의 국내 유리산업은 군소 병유리공장과 운크라 원조로 건설된 인천 판유리공장 정도였다. 1960년 초 TV방송이 시작되고 TV가 보급되면서 1970년대 초에는 CRT가 생산되고 1980년대 초에는 컬러TV 방영과 함께 CPT도 생산되었다.

1990년대 이후 디스플레이용 면유리의 연구개발은 더욱 활발해져 FED, LED, LCD 등이 등장해 현재 우리나라 디스플레이용 면유리산업은 세계를 선도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의 요업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최근 십수 년의 성과이지만 그 뿌리는 고려청자, 조선백자의 전통에서 찾을 수 있다. 그 기술이 단절되지 않았다면 우리나라는 이미 오래 전에 요업강국이 되었을 것이다.

대한요업총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 동안 추진한 사업 중 가장 보람을 느끼는 것도 ‘이삼평(李參平)’이라는 도공의 존재를 국내에 널리 알린 일이다.

이삼평은 공주에서 태어난 도공으로 1597년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도공들을 이끌고 아리타(有田) 뎅구다니(天狗谷)에 정착했다. 근처 이즈미야마에서 고령토를 발견하면서 아리타 도자기가 만들어져 일본 도자기의 원조가 되었다. 일본인들은 “아리타 사람은 하나의 산을 그릇으로 바꿨다”고 말한다.

아리타 도자기는 유럽에까지 수출되었다. 독일 마이센 지역으로 들어가 유럽 최초의 도자기가 만들어지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를 인연으로 아리타 시와 마이센 시는 현재 자매도시가 되어 교류하고 있다. 일본 사가현 아리타쵸에서는 해마다 도자기 축제 ‘아리타 도키치(有田陶器市)’가 성대하게 열린다. 1주일간 120만 명 이상이 방문하는 세계적인 축제다. 5킬로미터에 걸친 거리에 500여 개 점포에서는 평소의 3분의 1 가격에 도자기를 판매한다.

도조(陶祖, 도자기의 조상) 이삼평을 기리는 ‘도조제’도 주목받는 행사다. 도조신사는 도자기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될 만큼 진귀하다. 도조신사에서 걸어 올라가면 이삼평 비가 나온다. 이삼평이 일본에서 백자를 만든 지 300년(1916년)을 기념해 1917년 세워졌다.

대한요업총협회는 이삼평 공의 제14대 후손, 야마구치 아리타상공회의소 회장, 김기형 한국도자문화협회 회장, 이와나가 참의원, 사카이 사가현 부지사, 다시로 아리타쵸장 등과 함께 추모식에 참석해 이삼평 공의 위업을 기리고 도자(陶磁)문화를 통한 한-큐슈 교류증진 활동을 격려했다.

조선의 도공이 일본에서는 ‘도자기의 신(神)’으로 추앙받으며 매년 성대한 축제가 벌어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삼평이라는 도공이 있었는지조차 모르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리타도자기축제를 통해 우리나라의 도자기로 상징되는 요업기술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체감하는 것은 민족의 자긍심을 가지고 요업의 미래를 창조해가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 남기동 선생은...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100살이다. 일본 제6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신생 이공학부 응용화학과에 편입했다. 1946년 중앙공업연구소 지질광물연구소장, 요업 과장으로 근무하며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 등에도 출강했다. 부산 피난 중에도 연구하며 공학도들을 가르쳤다. 6·25 후 운크라 건설위원장을 맡아 1957년 연산 20만 톤 규모의 문경시멘트공장을 건설했다. 화학과장, 공업국 기감(技監)으로 인천판유리공장, 충주비료공장 등 공장 건설 및 복구사업을 추진했다. 1960년 국내 대학 최초로 한양대에 요업공학과를 창설하고 학과장을 맡았다. 1962년 쌍용양회로 옮겨 서독 훔볼트의 신기술 ‘SP킬른(Kiln)’ 방식으로 1964년 연산 40만 톤 규모의 영월공장을 준공했는데, 최단 공사기간을 기록해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영월공장 준공으로 우리나라는 시멘트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1968년 건설한 동해공장은 단위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공장 증설을 거듭해 1992년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량은 세계 5위가 되었다. 1978년 동양시멘트로 자리를 옮겨 2차 오일쇼크 때 시멘트 생산 연료를 벙커씨유에서 유연탄으로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 특허 대신 공개를 택해 업계를 위기에서 살려냈다. 이 공적으로 1981년 '3·1 문화상(기술상)'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 요청으로 1992년 인도네시아 최초의 시멘트공장인 '시비뇽 시멘트플랜트(P.T. SEMEN CIBINONG)'를 건설했다. 한국요업(세라믹) 학회, 한국화학공학회, 대한화학회등 3개 학회, 대한요업총협회(지금의 한국세라믹총협회) 회장으로 학계와 산업계의 유대를 다졌다. 학교, 연구소, 산업체가 참석하는 '시멘트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를 조직해 학술교류는 물론 민간교류에도 힘썼다. 세라믹학회는 그의 호를 따 장학지원 프로그램인 '양송 상'을 제정했다. 1993년 인하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2006년 서울대 설립 60돌 기념 '한국을 일으킨 60인' 상, 2007년 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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