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비전e] 1962년 초 쌍용그룹의 창업주인 성곡 김성곤 회장이 나를 만나자고 했다.

“시멘트사업에 진출하고 싶은데 양송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꼭 좀 도와주시오.”

성곡은 기업가로도 정치인으로도 파란만장했다. 1913년 대구고보에서 항일운동을 주도하다 퇴학 당하고 보성고보를 졸업했다. 보성전문 상과를 나와 대구부청, 대구상공은행에서 일하다 1939년 삼공유지를 설립했다. 1958년 민의원, 1963년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실세가 되었지만 내무부장관 해임안을 가결시킨 이른바 10・2항명사건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정계를 떠났다. 이후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에 취임했고, 1975년 타계 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성곡은 1962년 쌍용양회를 설립한 이래 제지, 해운 등으로 사업영역을 넓혀갔다. 경영권을 이어받은 김석원 회장도 정유, 중공업, 건설 등에 진출해 쌍용을 한때 재계 5위로 키웠다. 쌍용그룹 성장의 원천은 쌍용양회였다. 1970, 80년대 건설 붐을 타고 급성장한 쌍용양회는 시장점유율 20퍼센트가 넘는 국내 최대 시멘트회사가 되었다. 당시만 해도 시멘트는 없어서 못 팔았다. 쌍용그룹이 사업 영역을 넓힐 수 있었던 건 안정적인 수익을 올리는 쌍용양회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성곡은 그 쌍용양회 설립을 구상하면서 나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었다. 성곡이 공화당 재정위원장이던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이 공업입국을 위해선 시멘트산업을 더 키워야 하니 차관을 얻어 오라고 했다.

성곡이 믿을 사람은 나밖에 없다며 어떻게 해서든 좋은 조건에 차관을 주고 그 돈으로 공장을 지어줄 외국회사와 계약을 성사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성곡은 해방 직후 일본 동경방직 방적기 2,000추를 불하 받아 설립한 금성방직을 굴지의 섬유기업으로 키워놓고 있었는데, 바로 그 금성방직 명의로 차관을 얻어 와야 했다.

나로서는 아무래도 덴마크가 익숙했다. 덴마크로 날아가 문경공장을 지을 때 인연을 맺은 스미스와 협상을 시도했다. 스미스측은 차관 상환기간을 5년으로 한정하자고 했다. 문경공장 건설 때는 자금을 운크라에서 책임졌지만 이번에는 우리에게서 받아야 했기에 장기차관은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우리 정부는 아무리 짧아도 상환기간이 10년은 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난감했다.

바로 그때 한 가지 아이디어가 뇌리를 스쳤다. 쌍용으로 오기 전 한양공대에서 시멘트 생산에 관한 세계 각국의 새로운 기술 정보와 자료를 검토하던 중 서독 훔볼트(Humbolt Co.)에서 개발한 신기술에 관한 논문을 읽고 감명을 받았었다. ‘SP킬른(Kiln, 가마)’이라고 불리는 시멘트 소성방식이었다.

SP킬른 방식은 시멘트 원료를 가열할 때 4단계의 탑을 내려오면서 섭씨 1,350도까지 올라간 고온 폐가스를 다시 원료로 사용해 열효율을 획기적으로 높인 기술이었다. 기존의 거대한 로터리 킬른(Rotary Kiln, 원통형 회전가마)에 비해 에너지 효율이 월등히 높을 뿐 아니라 운전도 아주 쉬워졌다. 시멘트 제조원가의 3분의 1에 달하는 연료가 40퍼센트나 절약되고 시멘트 원료 선택도 단순화되는 장점이 있었다.

하지만 서독 외에 어떤 나라도 그 방식을 도입하고 있지 않아 어쩌면 무모할 수도 있는 도전이었다. 논문을 발표한 학자에게 연락해 더 자세한 내용을 보내달라고 해서 신기술을 어느 정도까지 실현할 수 있는지 면밀하게 검토했다. 그 결과 ‘바로 이거다!’ 하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나는 즉시 서독행 비행기에 올랐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도전하자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훔볼트는 서독 쾰른에 본사가 있고 시멘트 부서는 라인강 변에 있었다. 혁신적인 기술로 가동되는 새로운 공장을 방문해 실제로 가동되고 있는 상태를 점검했는데 놀라울 정도로 신기하고 만족스러웠다. 훔볼트와 차관 교섭과 기술 제공 및 건설에 합의하고 가계약을 체결했다.

협상 과정에서도 일화가 있다. 훔볼트 측은 회의를 영어로 하자고 했다. 그런데 협상 중간중간 쉬는 사이에 훔볼트측이 자기들끼리 독일어로 의견을 조율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독일어를 전혀 못 알아듣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듣자 하니 한국은 스미스에 가서 10년짜리를 요구했다가 퇴짜를 맞은 모양이야. 10년짜리로 해주는 대신 비용을 좀 높게 불러도 될 것 같아.”

“어차피 차관으로 주는 거니까 금액이 올라가면 이자도 많아질 테니 좋은 거지.”

“그런데 얼마나 더 불러야 할까?”

“적정 가격에서 50만 달러 정도 더 불러보면 어떨까? 솔직히 실비용은 설비와 인건비에 관리비까지 다 포함해도 거기서 100만 달러를 빼도 충분하니까 말이야.”

나는 그들의 대화를 다 알아들었지만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척, 일부러 두리번거리는 시늉까지 했다.

그리고 다음 협상에 임할 때 그들로부터 들은 정보를 토대로 실제 비용이 얼마인지 하나하나 따져가며 그들을 공략했다.

“우리가 분석한 바로는 지금 훔볼트에서 제시한 금액에서 100만 달러를 낮추어도 충분한 이득이 있을 것 같은데, 10년짜리로 해주는 조건으로 80만 달러 정도 깎아주면 계약할 의향이 있소.”

나의 제안에 그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속마음을 들켜 말까지 더듬었다. 결국 우리는 70만 달러나 되는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다.

계약이 체결되고 훔볼트 측은 우리를 위해 파티를 열어주었다. 파티 중 나에게 건배사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술잔을 높이 들고 활짝 웃으며 영어가 아니라 독일말로 멋지게 외쳤다.

“Prost!(건배!)”

이어서 나름 유창한 독일어로 “좋은 협상에 이렇게 훌륭한 식사까지 제공해 주어서 감사하다”는 취지의 인사말을 했다. 그러자 자리에 있던 훔볼트 측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나를 쳐다보았다. 얼굴까지 하얘진 훔볼트 측 대표가 나에게 소리쳤다.

“당신, 독일어를 할 줄 아시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오. 고등학교 때부터 독일어를 배웠소. 덴마크어도 잘합니다.”

“그럼 아까 협상할 때 우리끼리 하는 얘기를 다 알아들었다는 것이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소? 우리말을 그렇게 잘하면서 왜 영어로 협상을 한 것이오? 우리를 감쪽같이 속인 것 아니오?”

“난 속이지 않았고 속일 의도도 없었소. 영어로 협상하자고 한 것은 그대들이지 않소? 나에게 독일어를 할 줄 아느냐고 물어보지도 않았고 말이오. 나는 그대들이 원하는 대로 했을 뿐이오. 하하.”

훔볼트 측 대표가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일행들에게 말했다.

“이거 우리가 제대로 당했구먼! 하하하!”

그들도 웃었고 우리도 따라 웃었다. 그래서 더 친해졌다.

◆ 남기동 선생은...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100살이다. 일본 제6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신생 이공학부 응용화학과에 편입했다. 1946년 중앙공업연구소 지질광물연구소장, 요업 과장으로 근무하며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 등에도 출강했다. 부산 피난 중에도 연구하며 공학도들을 가르쳤다. 6·25 후 운크라 건설위원장을 맡아 1957년 연산 20만 톤 규모의 문경시멘트공장을 건설했다. 화학과장, 공업국 기감(技監)으로 인천판유리공장, 충주비료공장 등 공장 건설 및 복구사업을 추진했다. 1960년 국내 대학 최초로 한양대에 요업공학과를 창설하고 학과장을 맡았다. 1962년 쌍용양회로 옮겨 서독 훔볼트의 신기술 ‘SP킬른(Kiln)’ 방식으로 1964년 연산 40만 톤 규모의 영월공장을 준공했는데, 최단 공사기간을 기록해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영월공장 준공으로 우리나라는 시멘트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1968년 건설한 동해공장은 단위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공장 증설을 거듭해 1992년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량은 세계 5위가 되었다. 1978년 동양시멘트로 자리를 옮겨 2차 오일쇼크 때 시멘트 생산 연료를 벙커씨유에서 유연탄으로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 특허 대신 공개를 택해 업계를 위기에서 살려냈다. 이 공적으로 1981년 '3·1 문화상(기술상)'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 요청으로 1992년 인도네시아 최초의 시멘트공장인 '시비뇽 시멘트플랜트(P.T. SEMEN CIBINONG)'를 건설했다. 한국요업(세라믹) 학회, 한국화학공학회, 대한화학회등 3개 학회, 대한요업총협회(지금의 한국세라믹총협회) 회장으로 학계와 산업계의 유대를 다졌다. 학교, 연구소, 산업체가 참석하는 '시멘트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를 조직해 학술교류는 물론 민간교류에도 힘썼다. 세라믹학회는 그의 호를 따 장학지원 프로그램인 '양송 상'을 제정했다. 1993년 인하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2006년 서울대 설립 60돌 기념 '한국을 일으킨 60인' 상, 2007년 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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