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비전e] 학과가 생긴 이듬해인 1961년 봄, 서오릉으로 소풍을 갔다. 점심만 먹고 돌아오려다가 술판이 벌어졌는데 화공학도들답게 폭탄주를 제조하겠다면서 소주와 맥주의 이상적인 혼합비를 실험했다. 성능을 테스트하겠다며 용감한 남학생 몇이 자원했다가 그만 쓰러져 몇 시간이나 일어나지 못해 어두워져서야 돌아왔다.

요업공학과 1학년에는 여학생이 셋 있었다. 지금도 ‘공대’ 하면 남학생이 주류이지만, 당시에 여학생이 공대, 그것도 신설된 요업공학과에 세 명이나 들어온 것은 아주 이례적이었다. 어느 자매들이 그토록 의지하며 살까 싶을 정도로 세트로 붙어 다녔다.

하루는 여학생 삼총사가 나를 찾아왔다. 그중 한 명이 울먹이면서 내 앞에 메모지를 한 장 내밀었다.

「콩자반만 싸오지 말고 고기도 좀 싸올 것.」

자초지종은 이랬다.

제1공학관에는 여자화장실이 없어 멀리 떨어져 있는 교양학부 건물을 이용해야 했는데, 여학생 셋이 함께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 짓궂은 남학생들이 여학생들 도시락을 다까먹고 그것도 모자라 얄밉게 빈 도시락통에 메모까지 붙여놓았다고 했다.

“한두 번이 아녜요.”

점심 굶기를 밥 먹듯 하던 여학생들이 참다못해 나를 찾아온 것이다.

“교수님, 남학생들 혼 좀 내주세요.”

“아이고, 저런!”

남학생들의 장난이 지나쳤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대학생들을 학과장이 불러 야단을 친다는 것도 영 모양새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공학관 건물에 여자화장실을 설치해 달라고 건의하기도 여의치 않았다. 공대를 통틀어 열 명도 안 되는 여학생을 위해 화장실을 만들어줄 만큼 여유로운 시절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여학생들을 그냥 돌려보내는 것도 도리가 아니었다.

“밥을 굶어서야 되겠니? 일단 밥부터 먹고 얘기하자.”

나는 여학생 셋을 학교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중국집 간판을 보고 들어가 짜장면 세 그릇을 주문했다.

짜장면이 나오자 여학생 삼총사가 손뼉을 치며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교수님 덕분에 횡재했어요! 잘 먹겠습니다.”

“어서 먹거라. 그리고 다음에 또 남학생들에게 도시락을 털리면 굶지 말고 언제든 나에게들 오너라. 같이 짜장면 한 그릇씩 하면 좋지.”

배고픈 시절이었다.

다음해 입학한 어느 여학생이 하루는 빨간 하이힐을 신고 실험실에 들어왔는데, 남학생들이 그 여학생을 쳐다보느라 실험에 집중하지 못했다. 여학생 자신도 실험을 하기에 불편하고 면학 분위기에도 안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 망설이다가 따로 불러 타일렀다.

“그냥 운동화를 신고 다니면 안 되겠니?”

여학생은 무슨 큰 잘못이나 한 듯 얼굴이 빨개졌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대학 합격했다고 엄마한테 선물 받은 거라서 한번 신고 싶었는데…….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다시는 신고 오지 않을게요.”

지금 어느 교수가 그런 주문을 했다면 당장이라도 여성인권을 무시한 교수라고 교내 게시판에 대자보가 붙을 일이다. 지금 기준으로 생각하면 내가 큰 잘못을 한 것이다. 당시 그 여학생이 나의 지적을 잘 이해하고 받아준 것이 그래서 더 미안하고 고맙다.

2010년 한양대 세라믹공학과 감사패퍠

하루는 2학년에 막 올라온 학생이 내 방으로 찾아왔다.

“교수님, 집안에 사정이 생겨 더 이상 학업을 계속할 수 없게 되어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신입생 때부터 열심히 해서 성적도 우수한 제자였는데, 무슨 일인가 싶어 캐물었더니 역시나 등록금이 없었던 것이다. 마음이 아팠다. 시골에서 소를 팔아 자식 등록금을 댄다고 해서 대학을 ‘상아탑(象牙塔)’이 아니라 ‘우골탑(牛骨塔)’이라고 부르던 시절이었다. 제자의 손을 잡고 사정하듯이 말했다.

“자네도 알다시피 요업공학과는 이제 갓 시작한 학과가 아닌가. 우리에겐 이 분야를 개척해 나라와 국민에게 기여할 의무가 있네. 등록금 때문에 학업을 중단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지. 등록금은 내가 어떻게든 마련해 볼 테니 쓸데없는 생각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게. 이건 내 부탁이니 거절하지 말게.”

그러고 나서 이렇게 당부했다.

“그리고 이 일은 나와 자네만 알아야 하네. 누구에게도 말해선 안 되네.”

둘 만의 비밀에 부쳤던 것은 학우들 사이에 소문이 나서 행여 제자가 마음을 다칠까 우려해서였다. 나는 우선 적금을 깨고 나중엔 봉급에서 얼마씩 떼어두었다가 졸업 때까지 제자의 등록금을 대납해 주었다. 제자는 보답이라도 하려는 듯 더욱 학업에 매진해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런데 졸업식 다음 날 어떤 분이 나를 찾아왔다. 내가 학비를 내준 제자의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나에게 머리를 숙이더니 보수(지금의 수표) 한 장을 내밀었다. 수표에는 ‘2학년 얼마, 3학년 얼마, 4학년 얼마’ 하고 금액이 적혀 있었다.

“3년 전 사업 실패로 가산을 탕진했는데, 당시 아들아이가 좋은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해 등록금을 해결했다고 해서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어제 졸업식 날 제게 사실을 털어놓았습니다.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에 많이 울었습니다. 세상에 교수님 같은 스승이 어디 계시겠습니까? 저도 어느 정도 재기했으니 대납해주신 등록금을 받아주십시오.”

나는 잠시 망설이다 ‘좋은 일에 쓰겠다’ 생각하고 받았다. 그 아버지의 자존심을 지켜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제자는 그 후 우리나라 요업계의 요직을 두루 돌며 큰 활약을 했다.

◆ 남기동 선생은...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100살이다. 일본 제6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신생 이공학부 응용화학과에 편입했다. 1946년 중앙공업연구소 지질광물연구소장, 요업 과장으로 근무하며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 등에도 출강했다. 부산 피난 중에도 연구하며 공학도들을 가르쳤다. 6·25 후 운크라 건설위원장을 맡아 1957년 연산 20만 톤 규모의 문경시멘트공장을 건설했다. 화학과장, 공업국 기감(技監)으로 인천판유리공장, 충주비료공장 등 공장 건설 및 복구사업을 추진했다. 1960년 국내 대학 최초로 한양대에 요업공학과를 창설하고 학과장을 맡았다. 1962년 쌍용양회로 옮겨 서독 훔볼트의 신기술 ‘SP킬른(Kiln)’ 방식으로 1964년 연산 40만 톤 규모의 영월공장을 준공했는데, 최단 공사기간을 기록해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영월공장 준공으로 우리나라는 시멘트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1968년 건설한 동해공장은 단위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공장 증설을 거듭해 1992년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량은 세계 5위가 되었다. 1978년 동양시멘트로 자리를 옮겨 2차 오일쇼크 때 시멘트 생산 연료를 벙커씨유에서 유연탄으로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 특허 대신 공개를 택해 업계를 위기에서 살려냈다. 이 공적으로 1981년 '3·1 문화상(기술상)'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 요청으로 1992년 인도네시아 최초의 시멘트공장인 '시비뇽 시멘트플랜트(P.T. SEMEN CIBINONG)'를 건설했다. 한국요업(세라믹) 학회, 한국화학공학회, 대한화학회등 3개 학회, 대한요업총협회(지금의 한국세라믹총협회) 회장으로 학계와 산업계의 유대를 다졌다. 학교, 연구소, 산업체가 참석하는 '시멘트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를 조직해 학술교류는 물론 민간교류에도 힘썼다. 세라믹학회는 그의 호를 따 장학지원 프로그램인 '양송 상'을 제정했다. 1993년 인하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2006년 서울대 설립 60돌 기념 '한국을 일으킨 60인' 상, 2007년 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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