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시멘트산업의 살아있는 역사] 남기동 회고록(54) 최초의 요업공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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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시멘트산업의 살아있는 역사] 남기동 회고록(54) 최초의 요업공학과
  • 남기동
  • 승인 2019.06.1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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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비전e] 상공부에서 국책사업을 추진하느라 바쁜 중에도 나는 대학에 부지런히 출강을 했다. 한양공대 화공과가 처음 창설되었을 때부터 ‘규산염공업(요업)’과 ‘연료’ 과목 등을 강의했다.

기억나는 졸업생으로는 국회의원을 지낸 이봉모 화공과 교수, 공업화학과 교수를 지낸 김진일 등이 있다. 대학원 강의도 맡아 최상흘의 석사논문 지도교수로 연구지도와 심사도 했다.

상공부에서 공업행정을 하면서 통감한 것이 기술인재의 부족이었다. 운크라 같은 원조기구로부터 자금을 들여온다고 해도 정작 공장을 짓고 가동하려면 엔지니어들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나라에 그런 인재들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선진국 엔지니어들을 ‘모셔 와야’ 했다. 문경시멘트공장을 지을 때는 교통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방문을 꺼리는 외국 엔지니어들을 위해 활주로까지 닦아야 했을 정도다.

경제자립은 곧 기술자립인데 언제까지나 남의 나라 기술에 의존해 산업을 키울 수는 없었다.

우리 기술, 우리 기술자가 없으면 아무리 웅장한 공장을 지어도 그것은 사상누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특히, 시멘트를 포함한 요업(세라믹) 분야에서는 전문성과 경험을 갖춘 인재가 전무하다시피 했다. 한 명의 엔지니어라도 더 키우고 싶었다.

기술을 ‘주먹구구’로 익히거나 ‘어깨너머’로 터득하는 식으로는 안 될 일이었다. 공업선진국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탄탄한 이론적 토대 위에서 제대로 기술인재를 키워야 했다. 그 역할을 맡아줄 곳은 역시 대학밖에 없었다.

충주비료공장 건설공사가 한창이던 1959년도 어느덧 저물어가고 있었다. 나는 공직에서 나와 본격적으로 후학을 양성하는 게 어떨까 하는 고민이 깊어가고 있었다.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어느 날, 한양공대에서 강의를 마치고 나오는데 김연준 총장이 나를 찾았다. 김 총장과는 친분이 두터워 평소에도 학교 발전 문제로 의견을 나눌 때가 많았다.

일제강점기에 조그만 기술학원(동아공과학원)에서 출발한 한양공대는 해방 이후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공업입국’ 슬로건을 내걸고 중화학공업 시설을 확충하는 데 한양공대 출신들이 큰 힘을 보태고 있었다.

한양공대는 그 명성과 위상이 높아지면서 어느덧 서울대 공대에 버금가는 경쟁력을 갖추게 되었다. ‘한양공대’는 대한민국 산업계에서 자부심 넘치는 명문 브랜드로 통했다.

하지만 김 총장의 목표는 서울대 공대가 아니었다. ‘한국의 MIT(메사추세츠공과대학)’를 표방하며 HIT(한양공대)를 세계적 수준의 공과대학으로 키우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그러자면 그에 걸맞은 규모와 체계를 갖추어야 했다. 더 전문화되고 세분화된 전공학과 신설이 급선무였다.

“양송, 우리 한양공대에 새로운 학과를 설립하고 싶은데 어떤 것이 좋겠습니까?”

김 총장의 관심은 어떤 학과를 선택하느냐가 아니었다. 무슨 학과를 선택하더라도 그 학과가 왜 필요한지 확실한 이유가 더 중요했다. 확실한 명분이 있어야 정부를 설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문교부(지금의 교육부)는 대학에서 학과를 신설하는 것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다. 기존 학과의 증원조차 불허하는 정책을 고수했다. 그 시절 교육 당국은 ‘대학은 아무나 가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없지 않았다. 대학문이 넓어지면 너도 나도 대학에 가겠다고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당장 먹고살 것도 없는 나라에서 입시과열만 일어날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당장 산업현장에 투입해 일하는 게 급선무이지, ‘한가롭게’ 4년이나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인재가 부족한데도 인재를 키울 여력과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교육 당국의 이런 방침은 사립대에 대해서는 더욱 까다로웠는데, 우후죽순 생겨나는 사립대를 관리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국・공립대가 우선이었다.

그래서 증원은 물론이고 학과를 신설하려면 문교부가 수용할 수밖에 없는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했고, 김 총장은 나에게 그것을 요청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요업공학과 신설이 급합니다.”

“아시다시피 서울대 공대에도 아직 요업공학과는 없습니다.”

‘요업’이란 용어도 생소한 시절이었다. 국립 서울대에도 없는 학과를 사립 한양공대에서 신설하겠다고 하면 문교부가 승인해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우리나라 안에서는 서울대밖에 안 보이지요. 그렇지만 밖을 보면 요업공학과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가까운 일본만 봐도 요업공학을 가르치는 대학이 동경공대를 비롯해 두 개나 있습니다. 미국은 훨씬 더 많은 대학에서 세라믹(요업) 기술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알프레드에는 아예 요업대학이 있을 정도입니다. 요즘 미국에서는 세라믹열풍이 불고 있어 우수한 인재들이 요업공학과에 몰린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그렇긴 한데 문교부에서 다른 나라 얘기를 들으려고 할까요?”

“우리나라는 고려청자, 조선백자를 비롯해 역사적으로 요업선진국이었습니다. 고령토를 비롯해 다양하고 풍부한 요업원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근세기에 기술 전승이 단절되고 기술개발이 무시되는 정책으로 퇴보하고 말았습니다. 오히려 우리 기술자들의 지도를 받은 일본이 기술개발과 기술자 우대 정책으로 우리나라를 압도하고 기술대국으로 발전했지요. 우수한 요업인력을 양성해 요업기술강국으로 발전하고 있어요. 우리는 그릇공장, 유리공장 하나 짓고 운영하려고 해도 일본이나 미국 기술에 의존해야 합니다. 그게 다 요업공학을 가르치는 대학 한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육 당국에 이런 이야기를 해주셔야 합니다.”

전공(응용화학) 분야이기도 하지만 내가 요업공학과 신설을 강조한 것은 과학기술 진흥을 통한 경제성장 드라이브에 진력하고 있던 당시의 정부 정책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도자기 만드는 게 요업의 전부가 아닙니다. 시멘트, 유리, 내화물, 심지어 철강도 크게 보면 요업 분야라고 할 수 있지요. 부흥 초기 단계인 지금 요업은 우리나라에 긴요한 분야입니다.”

김 총장은 나의 말에 공감했다. 결심했다는 듯이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좋습니다! 어디 한번 해봅시다. 대신 약속 하나 해주시오.”

“무엇입니까?”

“내가 어떻게 해서든 문교부를 설득해 요업공학과 신설 승인을 받아올 테니 양송께서 학과장을 맡아주시오. 꼭 해주셔야 합니다.”

김 총장은 정말로 문교부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요업공학과와 함께 공업경영학과(지금의 산업공학과)까지 두 개 과를 공대에 신설하는 것을 허가받았다. 공업경영학 역시 당시 국내에서는 희귀한 분야로 경제개발에 반드시 필요했다. 이렇게 해서 국내 대학 최초로 한양공대에 요업공학과가 탄생하게 되었다.(이후 무기재료공학과, 신소재공학과로 명칭이 바뀌었다.)

서울대 요업학과(지금의 재료공학과)는 1967년에야 생겼다. 내가 가르친 화학공학과 출신들이 주축이 되어 창설했다. 아무튼 김 총장의 한양공대를 키우려는 집념이 서울공대보다 7년이나 앞섰던 것이다.

◆ 남기동 선생은...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100살이다. 일본 제6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신생 이공학부 응용화학과에 편입했다. 1946년 중앙공업연구소 지질광물연구소장, 요업 과장으로 근무하며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 등에도 출강했다. 부산 피난 중에도 연구하며 공학도들을 가르쳤다. 6·25 후 운크라 건설위원장을 맡아 1957년 연산 20만 톤 규모의 문경시멘트공장을 건설했다. 화학과장, 공업국 기감(技監)으로 인천판유리공장, 충주비료공장 등 공장 건설 및 복구사업을 추진했다. 1960년 국내 대학 최초로 한양대에 요업공학과를 창설하고 학과장을 맡았다. 1962년 쌍용양회로 옮겨 서독 훔볼트의 신기술 ‘SP킬른(Kiln)’ 방식으로 1964년 연산 40만 톤 규모의 영월공장을 준공했는데, 최단 공사기간을 기록해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영월공장 준공으로 우리나라는 시멘트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1968년 건설한 동해공장은 단위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공장 증설을 거듭해 1992년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량은 세계 5위가 되었다. 1978년 동양시멘트로 자리를 옮겨 2차 오일쇼크 때 시멘트 생산 연료를 벙커씨유에서 유연탄으로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 특허 대신 공개를 택해 업계를 위기에서 살려냈다. 이 공적으로 1981년 '3·1 문화상(기술상)'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 요청으로 1992년 인도네시아 최초의 시멘트공장인 '시비뇽 시멘트플랜트(P.T. SEMEN CIBINONG)'를 건설했다. 한국요업(세라믹) 학회, 한국화학공학회, 대한화학회등 3개 학회, 대한요업총협회(지금의 한국세라믹총협회) 회장으로 학계와 산업계의 유대를 다졌다. 학교, 연구소, 산업체가 참석하는 '시멘트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를 조직해 학술교류는 물론 민간교류에도 힘썼다. 세라믹학회는 그의 호를 따 장학지원 프로그램인 '양송 상'을 제정했다. 1993년 인하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2006년 서울대 설립 60돌 기념 '한국을 일으킨 60인' 상, 2007년 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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