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비전e] 내가 몸담고 있던 중앙공업연구소는 이름은 연구소이지만 인력, 예산, 설비 등 모든 면에서 근대적 공업연구소와는 거리가 멀었다. 당시의 우리 국력이나 우리 정부의 행정력으로는 근대적인 공업연구소를 제대로 운영하기가 어려운 형편이었다.

소장과 몇몇 간부의 희생적 노력으로 연구소 간판을 유지하면서 발전시켜보려 했지만 큰 포부를 펴보기는 어려웠다. 해외에서 최신 기술을 익히고 견문을 넓히고 돌아온 나는 좀 더 많은 연구와 인재육성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있었다.

문경공장 건설을 끝으로 후학 양성에 전념하려고 했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정부에서 계속 붙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문경공장이 한창 올라가고 있던 1956년 6월 김 장관은 사직서를 내려던 나를 화학과장에 임명했다. 당시 화학과장은 기술직 3급 공무원인 기정(技正)으로 지금의 서기관에 해당한다. 상공부에서 계속 일하라는 뜻이었다.

3년 후인 1959년 지금의 2급 이사관격인 공업국 기감(技監)을 맡았다. 한마디로 ‘일벌레’를 만드는 자리였다. 나는 미국 국제협력부(ICA, 지금의 국제개발처인 USAID) 원조, 각종 공장건설 및 복구사업 등을 추진했다. 하나하나가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긴요한 프로젝트였다. 지금도 보람으로 생각하고 있다.

충주비료공장 첫 가동

충주비료공장 역시 상공부 시절 작품이다. 해방 전 남한에는 화학비료 생산이 전무해 흥남질소비료공장 제품을 공급받아 왔다. 이것도 해방 직후 공급이 끊겨 남한은 1962년 충주비료공장이 가동되기 전까지 매년 미국이 제공하는 원조자금 2억5,000만 달러 중 1억 달러를 비료 도입에 써야 했다. 빈곤 퇴치를 위해 농업에 사용할 화학비료의 자급이 절실했다.

1959년 충북 충주 목행동에 요소비료를 생산할 공장을 건설했다. 이것을 바탕으로 내가 상공부를 떠난 뒤인 1961년에는 충주암모니아센터(제6비료공장)가 연산 23만1,000톤 규모로 확정되어 자급자족과 수출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을 탄생시킨 배경에도 충주비료공장이 등장한다. 1956년 국내 최초의 비료공장이 충주에 건설 중이었는데 미국인들이 기술자문역으로 드나들었다. 그때 소년 반기문은 기술자들의 부인들과 수시로 대화를 나누면서 ‘본토영어’를 제대로 익혔다고 한다. 그 실력으로 충주고 재학 중 ‘외국학생의 미국방문프로그램(VISTA)’에 선발되어 케네디 대통령을 만났고, 이를 계기로 외교관의 꿈을 키웠던 것이다. 충주비료공장이 대한민국의 산업만 키운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인재도 키운 셈이다.

지금은 한국판유리가 된 인천판유리공장도 그때 지은 것이다. 요업 분야인데다 그 공장 역시 운크라 자금을 당겨와 지었으니 내가 관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57년 인천판유리공장이 준공된 후 나는 남해 쪽에 하나를 더 건설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최적의 부지를 찾아 제2의 판유리공장 건설을 추진했으나 정치적 이해관계에 부닥쳐 무산되고 말았다. 유리 한 장이 아쉽던 시기에 자금을 확보하고도 나 같은 엔지니어나 공업행정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은 지금 생각해도 아쉬움이 크다.

비료, 판유리, 시멘트, 철강 등 주요 기간산업의 건설은 1960년대 이후 본격화된 대한민국 경제개발의 토대가 되었다. 내가 동경제대를 포기하고 경성제대를 나온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잘 된 일이기도 하다. 동경제대에 가려고 할 당시에는 일본이 패망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계획대로 동경제대에 들어가 공학도가 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경성제대 이공학부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일본인 학생들은 일본 패망과 동시에 교수들과 함께 본국으로 떠났다. 결국 해방 조국에서 국가를 재건하는 일은 남은 한국인 학생들의 몫이었다.

6・25 이후 시멘트산업을 일으키고 경제 재건에 기여한 데는 경성제대 응용화학과의 역할이 지대했다. 1회 졸업생 중 조선인 학생은 나를 포함해 두 명뿐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가적 차원에서 되돌아보면 나의 경성제대 입학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만약 내가 동경제대에서 공부를 했다면 본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거나 돌아왔다고 해도 경성제대 출신들과 함께 일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내가 경성제대 출신이기 때문에 국내에서 자연스럽게 인맥이 형성되었고 긴밀한 협조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동경제대 입학의 좌절은 전화위복으로 볼 수 있다. 조국을 위해 일할 기회를 주기 위한 하나님의 큰 계획이 있으셨던 것으로 생각한다.

대한민국 시멘트업계의 대부니, 거목이니, 살아 있는 전설이니 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부끄러워진다. 나는 그저 열심히 배운 것을 열심히 가르치고 국가 재건에 활용했을 뿐이다. 조국이 나를 필요로 하는 시기에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하나님 뜻대로 발휘했을 뿐이다.

◆ 남기동 선생은...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100살이다. 일본 제6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신생 이공학부 응용화학과에 편입했다. 1946년 중앙공업연구소 지질광물연구소장, 요업 과장으로 근무하며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 등에도 출강했다. 부산 피난 중에도 연구하며 공학도들을 가르쳤다. 6·25 후 운크라 건설위원장을 맡아 1957년 연산 20만 톤 규모의 문경시멘트공장을 건설했다. 화학과장, 공업국 기감(技監)으로 인천판유리공장, 충주비료공장 등 공장 건설 및 복구사업을 추진했다. 1960년 국내 대학 최초로 한양대에 요업공학과를 창설하고 학과장을 맡았다. 1962년 쌍용양회로 옮겨 서독 훔볼트의 신기술 ‘SP킬른(Kiln)’ 방식으로 1964년 연산 40만 톤 규모의 영월공장을 준공했는데, 최단 공사기간을 기록해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영월공장 준공으로 우리나라는 시멘트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1968년 건설한 동해공장은 단위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공장 증설을 거듭해 1992년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량은 세계 5위가 되었다. 1978년 동양시멘트로 자리를 옮겨 2차 오일쇼크 때 시멘트 생산 연료를 벙커씨유에서 유연탄으로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 특허 대신 공개를 택해 업계를 위기에서 살려냈다. 이 공적으로 1981년 '3·1 문화상(기술상)'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 요청으로 1992년 인도네시아 최초의 시멘트공장인 '시비뇽 시멘트플랜트(P.T. SEMEN CIBINONG)'를 건설했다. 한국요업(세라믹) 학회, 한국화학공학회, 대한화학회등 3개 학회, 대한요업총협회(지금의 한국세라믹총협회) 회장으로 학계와 산업계의 유대를 다졌다. 학교, 연구소, 산업체가 참석하는 '시멘트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를 조직해 학술교류는 물론 민간교류에도 힘썼다. 세라믹학회는 그의 호를 따 장학지원 프로그램인 '양송 상'을 제정했다. 1993년 인하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2006년 서울대 설립 60돌 기념 '한국을 일으킨 60인' 상, 2007년 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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