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비전e] 내가 보통학교 3학년 때 아버지는 병원을 황금동 68번지로 옮기셨다. 목조로 된 큰 집으로 큰길에 있었다. 무엇보다 목이 좋았다. 원래 ‘황금면옥’이라는 큰 국숫집이었다.

아버지는 이 국숫집을 개조해 병원으로 쓰고 2층을 올려 안채로 쓰기로 했다. 공사기간 동안 인근에 있는 아버지 지인의 집 별채에서 지냈다.

2층은 축대를 높게 쌓아 지었다. 덕분에 1925년 대홍수가 나서 대동강이 범람했을 때도 병원채에는 허리보다 높이 물이 들어왔지만 2층 안채는 끄떡없었다.

황금동 병원은 동네 이름 덕분인지 환자가 끊이지 않았다. 형편이 어려운 환자들에게는 진료비와 치료비를 받지 않았는데도 워낙 환자가 많아 병원은 날로 번창했다. 아버지는 수옥리에 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큰돈을 벌게 되었다.

아버지는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관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잘못된 판단으로 큰돈을 잃게 된 것이 계기였다. 양조장을 하는 사람에게 큰돈을 빌려주었다가 양조장이 망하는 바람에 돈을 떼이고 만 것이다.

아버지

그 후 아버지는 목돈이 생기면 땅을 조금씩 사두셨다. 아버지가 땅으로 눈을 돌린 데는 어머니의 조언이 크게 작용했다. 당시만 해도 일본인들이 평양시내 땅을 야금야금 사들이고 있는 것을 간파하셨던 것이다.

병원은 날이 갈수록 잘 되었고 아버지는 돈이 모이면 알맞은 땅을 물색해 구입하셨다. 그러다 보니 몇 년 안 되어 평양시내에 10만 평 가까운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땅을 많이 마련하신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남가락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홀어머니와 큰형이 물려받은 재산이 없어 힘겹게 살던 모습이 늘 맘에 걸렸던 것이다. 자신이 형제들을 대표해 대지에 나와 공부한 만큼 성공한 모습을 보여주고, 비록 유복자로 태어났지만 남씨 가문에서 당당한 자손으로 우뚝 서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런 심정은, 시내가 아니면 좀처럼 땅을 사는 법이 없는 아버지가 율리면에 있는 농지를 사들인 일에서도 엿볼수 있었다. 그 농지는 나의 6촌 형이자 아버지의 5촌 조카인 기헌 형님의 땅이었다.

기헌 형님은 율리면에서 제일가는 부자인 부친이 돌아가시고 나서 돈 관리를 잘못해 큰 빚을 지게 되었다. 그래서 물려받은 땅을 팔아 빚을 갚으려고 했다. 아버지는 조상 땅을 타성인에게 줄 수 없다며 자신이 사들였던 것이다. 기헌 형님의 자존심을 고려해 다른 사람을 중간에 내세우기까지 했다.

아버지는 이곳저곳에 있는 땅을 관리하기 위해 아침 일찍 자전거를 타고 둘러보곤 하셨다. 우리 3형제도 병원 앞 서씨 자전거방에서 자전거를 빌려 타고 동행하는 일이 잦았다. 시내 친척집을 아침 일찍 방문하기도 했다.

◆ 남기동 선생은...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100살이다. 일본 제6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신생 이공학부 응용화학과에 편입했다. 1946년 중앙공업연구소 지질광물연구소장, 요업 과장으로 근무하며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 등에도 출강했다. 부산 피난 중에도 연구하며 공학도들을 가르쳤다. 6·25 후 운크라 건설위원장을 맡아 1957년 연산 20만 톤 규모의 문경시멘트공장을 건설했다. 화학과장, 공업국 기감(技監)으로 인천판유리공장, 충주비료공장 등 공장 건설 및 복구사업을 추진했다. 1960년 국내 대학 최초로 한양대에 요업공학과를 창설하고 학과장을 맡았다. 1962년 쌍용양회로 옮겨 서독 훔볼트의 신기술 ‘SP킬른(Kiln)’ 방식으로 1964년 연산 40만 톤 규모의 영월공장을 준공했는데, 최단 공사기간을 기록해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영월공장 준공으로 우리나라는 시멘트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1968년 건설한 동해공장은 단위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공장 증설을 거듭해 1992년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량은 세계 5위가 되었다. 1978년 동양시멘트로 자리를 옮겨 2차 오일쇼크 때 시멘트 생산 연료를 벙커씨유에서 유연탄으로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 특허 대신 공개를 택해 업계를 위기에서 살려냈다. 이 공적으로 1981년 '3·1 문화상(기술상)'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 요청으로 1992년 인도네시아 최초의 시멘트공장인 '시비뇽 시멘트플랜트(P.T. SEMEN CIBINONG)'를 건설했다. 한국요업(세라믹) 학회, 한국화학공학회, 대한화학회등 3개 학회, 대한요업총협회(지금의 한국세라믹총협회) 회장으로 학계와 산업계의 유대를 다졌다. 학교, 연구소, 산업체가 참석하는 '시멘트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를 조직해 학술교류는 물론 민간교류에도 힘썼다. 세라믹학회는 그의 호를 따 장학지원 프로그램인 '양송 상'을 제정했다. 1993년 인하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2006년 서울대 설립 60돌 기념 '한국을 일으킨 60인' 상, 2007년 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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