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비전e] 아버지는 19세기에 태어나셨다. 1892년 6월 29일생으로 살아계시면 127세가 되신다. 큰형의 생일이 아버지와 같다.

아버지의 원래 이름은 우(祐)자 항렬로 남석우(南奭祐)였다. 하지만 운명처럼 이름을 바꾸게 된다.

아버지는 어려서 서당을 다녔는데 하나를 배우면 열을 깨우칠 정도로 출중한 학동이었다. 떡잎을 알아본 훈장이 하루는 아버지를 불러놓고 이렇게 제안했다.

“너는 크게 될 재목이다. 그러니 네 이름을 다시 지어주마. 이 서당에서도 네가 제일이고 훗날 천하에서도 제일이 되라는 뜻으로 너 여(汝)에 맏 백(伯)을 써 ‘여백(汝伯)’이라고 하면 어떻겠느냐?”

아버지는 어린 마음에도 ‘여백’이라는 이름이 좋았다고 한다. 훈장에게서 새 이름을 받아들고 집으로 온 아버지는 할머니와 오성 큰 아버지에게 보여주었다고 한다.

“저도 이 이름이 맘에 들어요. ‘여백’으로 바꾸고 싶어요.”

아무리 훈장의 작명이라고 해도 뼈대 있는 가문에서 항렬자 이름 대신 다른 이름을 쓴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파격이었다. 하지만 아버지 자신의 의지가 확고했고, 할머니나 오성 큰아버지도 자식과 동생이 잘 된다고 하는데 반대만 하는 것도 능사가 아니었다. 그래서 이름 바꾸는 것을 허락하셨다. 대지로 내보내 신학문을 배우도록 할 계획을 하고 있을 정도로 깨인 분들이었으므로 이름을 바꿀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한다.

여백이라는 새 이름은 아버지에게 최고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기에 충분한 브랜드가 되었을 것이다.

서당에서 기초 공부를 마치고 아버지는 큰형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평양으로 유학을 갔다. 처음엔 숭실중학교에 입학해 다니다가 두각을 나타내며 평양고등보통학교로 옮겼다.

졸업 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해 1916년에 4년 과정을 마쳤다. 가락골에서 태어나 경성에 유학해 의사가 되었으니 ‘네가 최고’라는 이름값을 톡톡히 한 셈이다.

아버지는 당시 조선총독부 의원부속 의학강습소를 졸업해 강습소로는 마지막 졸업생이었다. 당시 졸업생들이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으로 해달라고 졸랐지만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의학교 졸업 후 아버지는 평양에 있는 자혜의원 피부과에 근무했다. 자혜의원은 훗날 ‘평안도립병원’, ‘평양의전 부속의원’ 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 시절 사진을 보면 아버지는 제복을 입고 칼을 차고 있는데 의사와는 거리가 먼 장교처럼 보인다. 당시 자혜의원이 조선총독부 산하에 있었고 의사도 임관하는 의식을 치러야 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어깨가 무거웠을 것이다. 홀어머니와 큰형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자신이 대지로 나가 신학문을 배우고 의사가 된 것이니 반드시 성공해 그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컸다. 자식들은 물론 조카들의 앞날까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에는 월급 받는 의사로는 역부족임을 통감하셨을 것이다.

아버지는 ‘임관’한 지 몇 해 만에 자혜의원을 그만두고 평양 수옥리 74번지에 병원 문을 여셨다. 당시 수옥리에는 여관이 많았는데, 지금도 ‘동양여관’, ‘서반여관’ 같은 간판이 생각난다. 여관이 많다는 것은 거주민보다는 여행객이 많음을 의미했다. 병원 입지로는 별로 좋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병원이 전찻길에서 골목으로 들어와 있었다. 큰길이 아니고 골목길에 있으니 환자가 많이 찾아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뭔가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셨다.

◆ 남기동 선생은...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100살이다. 일본 제6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신생 이공학부 응용화학과에 편입했다. 1946년 중앙공업연구소 지질광물연구소장, 요업 과장으로 근무하며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 등에도 출강했다. 부산 피난 중에도 연구하며 공학도들을 가르쳤다. 6·25 후 운크라 건설위원장을 맡아 1957년 연산 20만 톤 규모의 문경시멘트공장을 건설했다. 화학과장, 공업국 기감(技監)으로 인천판유리공장, 충주비료공장 등 공장 건설 및 복구사업을 추진했다. 1960년 국내 대학 최초로 한양대에 요업공학과를 창설하고 학과장을 맡았다. 1962년 쌍용양회로 옮겨 서독 훔볼트의 신기술 ‘SP킬른(Kiln)’ 방식으로 1964년 연산 40만 톤 규모의 영월공장을 준공했는데, 최단 공사기간을 기록해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영월공장 준공으로 우리나라는 시멘트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1968년 건설한 동해공장은 단위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공장 증설을 거듭해 1992년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량은 세계 5위가 되었다. 1978년 동양시멘트로 자리를 옮겨 2차 오일쇼크 때 시멘트 생산 연료를 벙커씨유에서 유연탄으로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 특허 대신 공개를 택해 업계를 위기에서 살려냈다. 이 공적으로 1981년 '3·1 문화상(기술상)'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 요청으로 1992년 인도네시아 최초의 시멘트공장인 '시비뇽 시멘트플랜트(P.T. SEMEN CIBINONG)'를 건설했다. 한국요업(세라믹) 학회, 한국화학공학회, 대한화학회등 3개 학회, 대한요업총협회(지금의 한국세라믹총협회) 회장으로 학계와 산업계의 유대를 다졌다. 학교, 연구소, 산업체가 참석하는 '시멘트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를 조직해 학술교류는 물론 민간교류에도 힘썼다. 세라믹학회는 그의 호를 따 장학지원 프로그램인 '양송 상'을 제정했다. 1993년 인하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2006년 서울대 설립 60돌 기념 '한국을 일으킨 60인' 상, 2007년 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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