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비전e] 아버지는 사별 후 어머니와 결혼하셨다. 아버지가 몇 살에 처음 결혼을 하셨고 그 분이 언제 돌아가셨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독쟁이마을 윤씨란 것만 들어서 알 뿐이다. 우리집에는 그 분을 회상할 것이 전혀 없었다.

사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정확하게 언제 혼인했는지도 모른다. 다만 아버지가 1916년에 경성의전을 졸업했으니 그보다 2~3년 전이 아닐까 추정할 뿐이다. 1914년에 결혼하셨다면 경성의전 3학년 때일 테고, 네 살 아래인 어머니는 열아홉에 시집을 온 것이다.

우리 가족은 평양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가락골에서 평양으로 온 많은 손님을 치러야 했다. 시어머니인 할머니께서 가락골에서 평양나들이를 하시면 당연히 우리집에 묵으셨고 그 밖의 친지들도 평양에 오면 우리집에 묵었다.

평양으로 유학 온 큰집 사촌형들도 우리집에서 학교를 다녔다. 사촌형들은 광성고등보통학교에 다녔는데, 평양고등보통학교 입학시험에 떨어져 그보다 커트라인이 낮은 광성고보에 입학했던 것이다.

시댁 조카를 여럿 데리고 있으면서 학교에 보내고 하루가 멀다 하고 손님을 치르면서도 어머니가 힘들어하거나 싫어하는 기색을 보인 적은 없었다. 다행히 어머니는 건강하셨고 근시가 있었지만 안경을 쓰진 않으셨다.

황금동 68번지로 이사한 후에도 중성 큰집 형님들이 우리집에서 평양고등보통학교에 다녔다. 그중 기항 형님은 우리 큰형보다 네 살이 많았지만 재수해서 고보에 들어간 반면 큰형은 1년을 월반해 한 학년밖에 차이가 안 났다. 기흠 형님은 큰형보다 1년 위였지만 학교가 늦어져 기섭이 형과 평양고보 동급생이었다. 4년이나 늦은 셈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어머니는 시댁 손님들을 치르고 시조카들을 거두느라 무척이나 고달프셨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 4남매가 잘 자라고 학교 성적이 모두 우수해 1, 2등을 차지하고 최고 수준의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것으로 보람을 찾으셨던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드러내놓고 자식자랑을 하지는 않으셨다. 성적이 원하는 만큼 나오지 않아 고전하는 조카들과 큰집 어른들을 배려해서였을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할머니

어머니가 많은 손님을 치르는 덕분에 우리 형제들은 남씨 집안 친척들과 자주 마주치게 되어 가락골에 살지 않아도 하나 어색함이 없었다. 우리가 주말이나 방학에 가락골로 놀러갈 때마다 관심을 받고 특별할 정도로 보살핌을 받은 것도 어머니가 평소 헌신적으로 쏟은 정성 덕분이었다.

어머니는 1남5녀 가운데 장녀다. 외할아버지는 낚시와 함께 화초를 가꾸는 취미를 가지고 계셨다. 우리집에 찾아오는 사람 중에 우리 형제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가 안겼던 분이 바로 외할머니였다. 외할머니는 정정하셔서 사동까지 걸어와 전차를 타고 오셨는데 언제나 맛있는 모래무지가 손에 들려 있었다. 외할아버지가 신무리에서 낚시로 잡은 것이었다.

외할아버지도 이따금 오셨는데 당시 우리집에 전화가 있어서 평양부청에 근무하는 외삼촌에게 전화를 거시곤 했다. 그때 평양부청 전화번호가 160번이고 교환수에게 말로 번호를 알려주어 교환하는 방식이었는데 그때마다 외할아버지는 일본말로 160번을 “학구노구주방”이라 발음하셔서 우리가 발음이 틀렸다고 웃곤 했다. 우리가 아무리 “햐쿠로쿠쥬방”이라고 알려드려도 웃으시며 계속 “학구노구주방”이라 하셨다.

외할아버지는 예전에 풍이 지나간 탓인지 입이 한쪽으로 일그러져 있었는데 한번은 우리가 흉내를 냈다가 어머니한테 꾸중을 듣기도 했다. 물론 외할아버지는 괜찮다고 하시며 웃으셨다.

평양부청에 근무하는 외삼촌은 신무리에서 나룻배로 대동강을 건너와 사동까지 걸어와 다시 전차를 타고 평양부청에 출근했다. 외삼촌은 우리 4남매를 무척 귀여워하셨다. 우리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가끔 부청에 들르면 옆에 있는 동료들에게 조카들이 공부를 잘한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을 하셨다.

외삼촌은 아들만 둘을 두었는데 재익과 재섭이다. 재섭이는 훗날 서울에서 살았다. 고향을 떠나려고 떠난 것이 아니라 평양에서 중학교에 다닐 때 6・25가 나서 의용군으로 전선에 투입되었다가 포로가 되었는데 반공포로 석방 때 구사일생으로 풀려났다.

외가인 경주 김씨 집안에는 머리 좋은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진사 급제한 분이 여럿 계셨다. 조선시대에는 평안도 사람에게는 좀처럼 벼슬을 주지 않아서 진사 급제는 극히 드문 일이었다. 우리 형제들이 공부를 잘한 것도 외탁을 한 것이 아닐까 한다. 남씨 가문에는 진사 한 분이 없었다. 그러고 보면 아버지가 경성의전을 나온 것도 외탁을 한 것이 아닐까 한다. 할머니 집안도 벼슬을 많이 한 명문가다.

◆ 남기동 선생은...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100살이다. 일본 제6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신생 이공학부 응용화학과에 편입했다. 1946년 중앙공업연구소 지질광물연구소장, 요업 과장으로 근무하며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 등에도 출강했다. 부산 피난 중에도 연구하며 공학도들을 가르쳤다. 6·25 후 운크라 건설위원장을 맡아 1957년 연산 20만 톤 규모의 문경시멘트공장을 건설했다. 화학과장, 공업국 기감(技監)으로 인천판유리공장, 충주비료공장 등 공장 건설 및 복구사업을 추진했다. 1960년 국내 대학 최초로 한양대에 요업공학과를 창설하고 학과장을 맡았다. 1962년 쌍용양회로 옮겨 서독 훔볼트의 신기술 ‘SP킬른(Kiln)’ 방식으로 1964년 연산 40만 톤 규모의 영월공장을 준공했는데, 최단 공사기간을 기록해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영월공장 준공으로 우리나라는 시멘트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1968년 건설한 동해공장은 단위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공장 증설을 거듭해 1992년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량은 세계 5위가 되었다. 1978년 동양시멘트로 자리를 옮겨 2차 오일쇼크 때 시멘트 생산 연료를 벙커씨유에서 유연탄으로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 특허 대신 공개를 택해 업계를 위기에서 살려냈다. 이 공적으로 1981년 '3·1 문화상(기술상)'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 요청으로 1992년 인도네시아 최초의 시멘트공장인 '시비뇽 시멘트플랜트(P.T. SEMEN CIBINONG)'를 건설했다. 한국요업(세라믹) 학회, 한국화학공학회, 대한화학회등 3개 학회, 대한요업총협회(지금의 한국세라믹총협회) 회장으로 학계와 산업계의 유대를 다졌다. 학교, 연구소, 산업체가 참석하는 '시멘트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를 조직해 학술교류는 물론 민간교류에도 힘썼다. 세라믹학회는 그의 호를 따 장학지원 프로그램인 '양송 상'을 제정했다. 1993년 인하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2006년 서울대 설립 60돌 기념 '한국을 일으킨 60인' 상, 2007년 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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