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비전e] 외가는 대동군 임원면 청호리였다. 대동강 오른 변에 있고 외가 동네 앞은 절벽이었다. 절벽 위에 오르면 미림마을이 나지막하게 파묻힌 것같이 내려다보였다.

우리 3형제는 방학 때 외가에도 자주 갔는데 여동생 기진이와 함께한 기억이 전혀 없다. 아마도 기진이가 너무 어려서 먼 길을 가기가 힘들어 그랬던 것이리라.

전차를 타고 대동강 인도교를 건너 사동까지 30~40분 걸렸다. 이 지역에서 일본 해군이 탄광을 파고 있어서 철로가 놓여 있었다. 드문드문 다니는 기차였지만 사동의 소수 일본인이 주 승객이어서 비어 있을 때가 많았다.

사동역에서 내려 신무리 나루터까지 30~40분쯤 걸어가는 도중에 술바우(酒巖)마을이 있었는데 작은외할아버지(외할아버지의 동생)가 정미소를 운영하고 계셨다.

나루터는 미림마을에서 10분 거리였는데 나룻배가 없으면 건너편 신무리에 대고 큰소리로 “사공!” 하고 외치면 사공이 나룻배를 저어 건너왔다.

약송보통학교 시절. 쌍둥이 형 덕분에 늘 2등을 했다.

여름방학에 가면 강가에 커다란 수양버들이 늘어서 있었고 매미소리가 요란했다. 외가에서는 배도 타면서 대동강에서 많이 놀았다. 어른 네댓이 탈 수 있는 나룻배를 ‘매생이’라 불렀는데,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는 몰라도 보트보다 너비가 있어 안정되고 다루기도 쉬웠다.

매생이는 평양의 대동강에서는 볼 수 없는, 외가 동네의 독특한 배였다. 먼 훗날 남쪽에서 파래같이 생긴 것을 ‘매생이’라 부르며 굴국밥 같은 음식에 넣어 먹는데, 이름이 같아 그 시절 타고 놀던 매생이 생각이 나곤 했다.

외할아버지는 매생이를 타고 낚시를 즐기셨다. 낚싯대로 낚는 것이 아니라 줄에 일정 간격으로 낚싯바늘을 연결한 주낙을 하룻밤 풀어두었다가 다음날 감아올려 보면 뱀장어 같은 것이 걸려 올라 왔다. 다른 물고기도 많이 올라왔는데 나는 그중 모래무지가 가장 맛있었다.

어느 해 여름방학에 우리 3형제가 강에서 멱을 감다가 쌍둥이 기섭이 형이 물에 빠져 떠내려 갔다. 우리가 소리를 지르자 언덕에 계시던 외할아버지가 놀라서 그대로 물에 뛰어들어 형을 건져내던 광경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나중에 평양집에 돌아와 형이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이야기를 들으시고 어머니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가슴을 쓸어내리셨다. 외할아버지가 어머니라고 부르시던 아주 늙으신 할머니는 셋째외할아버지댁에 계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 남기동 선생은...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100살이다. 일본 제6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신생 이공학부 응용화학과에 편입했다. 1946년 중앙공업연구소 지질광물연구소장, 요업 과장으로 근무하며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 등에도 출강했다. 부산 피난 중에도 연구하며 공학도들을 가르쳤다. 6·25 후 운크라 건설위원장을 맡아 1957년 연산 20만 톤 규모의 문경시멘트공장을 건설했다. 화학과장, 공업국 기감(技監)으로 인천판유리공장, 충주비료공장 등 공장 건설 및 복구사업을 추진했다. 1960년 국내 대학 최초로 한양대에 요업공학과를 창설하고 학과장을 맡았다. 1962년 쌍용양회로 옮겨 서독 훔볼트의 신기술 ‘SP킬른(Kiln)’ 방식으로 1964년 연산 40만 톤 규모의 영월공장을 준공했는데, 최단 공사기간을 기록해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영월공장 준공으로 우리나라는 시멘트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1968년 건설한 동해공장은 단위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공장 증설을 거듭해 1992년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량은 세계 5위가 되었다. 1978년 동양시멘트로 자리를 옮겨 2차 오일쇼크 때 시멘트 생산 연료를 벙커씨유에서 유연탄으로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 특허 대신 공개를 택해 업계를 위기에서 살려냈다. 이 공적으로 1981년 '3·1 문화상(기술상)'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 요청으로 1992년 인도네시아 최초의 시멘트공장인 '시비뇽 시멘트플랜트(P.T. SEMEN CIBINONG)'를 건설했다. 한국요업(세라믹) 학회, 한국화학공학회, 대한화학회등 3개 학회, 대한요업총협회(지금의 한국세라믹총협회) 회장으로 학계와 산업계의 유대를 다졌다. 학교, 연구소, 산업체가 참석하는 '시멘트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를 조직해 학술교류는 물론 민간교류에도 힘썼다. 세라믹학회는 그의 호를 따 장학지원 프로그램인 '양송 상'을 제정했다. 1993년 인하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2006년 서울대 설립 60돌 기념 '한국을 일으킨 60인' 상, 2007년 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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