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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시멘트산업의 살아있는 역사] 남기동 회고록(25) 오성 큰아버지

[뉴스비전e]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4남1녀를 두셨는데 막내가 아버지다.

장남이 오성 큰아버지인데, 오성은 평양 외성(바깥 성)으로 큰어머니의 친정이다. 결혼한 남자는 처가 동네 이름을 호칭 앞에 붙여주는 것이 우리네 전통이었다. 호칭만으로도 어느 마을로 장가를 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

둘째아들인 서촌 큰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셔서 뵙지 못했다. 서촌 큰어머니는 친정이 평양 서쪽 시골마을 서포다.

셋째아들이 중성 큰아버지로 큰어머니가 평양성 중성(가운데 성) 출신이셨다.

둘째, 셋째 큰아버지 사이에 고모가 한 분 계셨는데 미림마을 윤씨 집안으로 출가해 자손을 많이 두셨다.

할머니는 오성 큰집에 계셨다. 할머니 친정인 현씨 집안은 장수하는 분이 많아 할머니의 오빠 되시는 분이 백수를 넘겨 사셨다고 한다. 할머니도 1950년에 97세로 평양 황금동 우리집에 계셨는데 나의 큰형이 집에 갔을 때까지만 해도 정정하셨다고 한다. 아직 깨끗하시고 눈도 귀도 밝으셔서 장손인 광현이가 잘 있느냐고 물으실 정도로 말이다.

다만 이가 없으셔서 연한 것만 드셨다. 1・4후퇴 때 내려오시지 못해 생사를 알 수는 없었지만 모르긴 해도 백수를 넘겨 사셨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다. 젊을 때 술을 너무 좋아해 부친의 눈밖에 났다고 한다. 그래서 재산을 큰아들인 신무리 큰할아버지에게 대부분 물려주시고 우리 할아버지에게는 거의 주지 않으셨다고 한다. 그래서 신무리 큰할아버지는 대동군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부자였지만 우리 할아버지는 재산도 없이 4남1녀를 키우느라 고생이 많으셨다.

할아버지마저 일찍 돌아가셨는데 당시 할머니가 서른아홉, 맏아들인 오성 큰아버지가 열여섯밖에 안 되었고 막내인 아버지는 아직 할머니 배 속에 있었다. 아버지는 유복자였던 것이다.

오성 큰아버지는 부지런히 일하며 홀로 된 어머니를 모시고 아버지처럼 동생들을 키우셨다. 어려운 살림에도 두 아우, 중성 큰아버지와 우리 아버지를 평양까지 보내 신학문을 배우게 하셨다. 지금으로부터 134년 전에 평양 30리 밖 시골에서 아우들을 평양에 유학 보냈다니! 오성 큰아버지는 정말 대단하시다.

아버지는 서당공부를 마치고 나서 숭실보통학교, 평양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의학전문학교에 들어가 졸업 후 의사가 되었지만, 아버지보다 앞서 평양으로 유학 간 중성 큰아버지는 몸이 허약한 탓인지 병치레가 잦아 평양고보에 다니다 끝내 학업을 포기하고 말았다. 결국 할머니의 5남매 중 막내인 아버지만 평양과 경성으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아버지는 어깨가 무척이나 무거웠을 것이다.

할머니

가락골 남씨 집안에는 일찍 개화한 분이 많아 동네에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를 두 개나 유치하는 데 큰 힘을 보탰다. 한 면에 하나 두는 보통학교는 당연히 면사무소가 있는 마을에 있어야 했지만, 원칙을 깨고 율리면사무소가 있는 무진마을이 아니라 가락골에 보통학교가, 그것도 두 개씩이나 세워진 것은 남씨 집안의 학구열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준다.

아버지가 의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평양에서 병원 문을 열어 우리 가족이 처음 정착한 곳은 평양시 수옥리 74번지였다. 할머니가 계시는 가락골을 우리는 ‘촌’이라고 불렀다. 가락골에는 세 큰아버지댁 집들이 그림같이 있었다. 동네에서 세 큰집만 기와집이고 다른 집은 모두 초가였다. 특히 신무리 오성 큰집 안채는 2층이어서 멀리서도 우뚝 솟아 보여 가락골의 랜드마크나 다름없었다.

내가 보통학교에 다닐 때까지 오성 큰집 사랑채에는 마구간이 있었고 조랑말도 한 마리 있었다. 당시에는 웬만한 부자가 아니면 말을 키울 수 없었는데 가락골을 통틀어 오성 큰집에만 있었다. 방학 때 형들과 말을 타고 놀던 생각이 난다. 조랑말이긴 했지만 조그만 우리 눈에는 엄청나게 크게 보였다.

방학이 되면 우리 3형제는 가락골에 가서 열흘씩 있다 오곤 했다. 할머니가 계시는 오성 큰집에 주로 묵었고 나이가 엇비슷한 사촌형들이 있는 중성 큰집에서도 지냈다.

낮에는 사촌형들을 따라 무진천으로 멱을 감으러 가기도 했다. 무진천은 헤엄치기에 딱 좋은 너비와 깊이였다. 저녁에는 우리 3형제를 위해 이 집 저 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차려 주었다. 특히 닭고기가 듬뿍 들어간 밀제비국이 무척 맛있었다. 오성 큰집이 반찬이 가장 많았다.

평양에서 가락골로 가는 길은 두 갈래였다. 처음부터 걸어서 가는 길과 전차를 타고 역포까지 가서 15리 가량 걷는 길이다. 앞의 길은 “뭍으로 간다”고 했고, 뒤의 길은 ‘역포길’이라고 했다.
전차를 기다리는 시간을 감안하더라도 걷기만 하는 것보다는 전차를 타는 것이 빨라 우리 3형제는 대개 역포길로 갔는데 가끔은 자전거를 타기도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뭍으로 다니셨다. 모르긴 해도 전차요금을 아끼시려고 그랬던 것 같다.

평양 동쪽은 역포, 중화로 가면서 준평원을 이루고 있었는데 온통 붉은색에 가까운 황톳길이었다. 평양 시내에서 신발이 빨갛게 물든 사람은 동촌(동쪽 시골마을)에서 온 것인 줄 알 수 있었다. 우리도 학교에서 돌아와 아버지와 어머니 신발이 빨간 것을 보고 가락골에 다녀오신 걸 알았다.

◆ 남기동 선생은...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100살이다. 일본 제6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신생 이공학부 응용화학과에 편입했다. 1946년 중앙공업연구소 지질광물연구소장, 요업 과장으로 근무하며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 등에도 출강했다. 부산 피난 중에도 연구하며 공학도들을 가르쳤다. 6·25 후 운크라 건설위원장을 맡아 1957년 연산 20만 톤 규모의 문경시멘트공장을 건설했다. 화학과장, 공업국 기감(技監)으로 인천판유리공장, 충주비료공장 등 공장 건설 및 복구사업을 추진했다. 1960년 국내 대학 최초로 한양대에 요업공학과를 창설하고 학과장을 맡았다. 1962년 쌍용양회로 옮겨 서독 훔볼트의 신기술 ‘SP킬른(Kiln)’ 방식으로 1964년 연산 40만 톤 규모의 영월공장을 준공했는데, 최단 공사기간을 기록해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영월공장 준공으로 우리나라는 시멘트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1968년 건설한 동해공장은 단위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공장 증설을 거듭해 1992년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량은 세계 5위가 되었다. 1978년 동양시멘트로 자리를 옮겨 2차 오일쇼크 때 시멘트 생산 연료를 벙커씨유에서 유연탄으로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 특허 대신 공개를 택해 업계를 위기에서 살려냈다. 이 공적으로 1981년 '3·1 문화상(기술상)'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 요청으로 1992년 인도네시아 최초의 시멘트공장인 '시비뇽 시멘트플랜트(P.T. SEMEN CIBINONG)'를 건설했다. 한국요업(세라믹) 학회, 한국화학공학회, 대한화학회등 3개 학회, 대한요업총협회(지금의 한국세라믹총협회) 회장으로 학계와 산업계의 유대를 다졌다. 학교, 연구소, 산업체가 참석하는 '시멘트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를 조직해 학술교류는 물론 민간교류에도 힘썼다. 세라믹학회는 그의 호를 따 장학지원 프로그램인 '양송 상'을 제정했다. 1993년 인하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2006년 서울대 설립 60돌 기념 '한국을 일으킨 60인' 상, 2007년 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남기동  news@nv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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