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시멘트산업의 살아있는 역사] 남기동 회고록(24) 가래나무가 빛나던 그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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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시멘트산업의 살아있는 역사] 남기동 회고록(24) 가래나무가 빛나던 그곳
  • 남기동
  • 승인 2019.05.01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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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비전e] 내 고향은 평양이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다음 달인 4월 13일에 태어났다. 부모님은 큰아들(기용)을 낳고 2년 뒤 아들 쌍둥이(기섭・기동)를 얻고 끝으로 딸(기진) 하나를 보셨다. 나는 쌍둥이 중 동생이다.

나의 유년시절 추억은 우리집이 있었던 평양보다는 아버지의 고향인 가락골에 많이 남아 있다.

가락골의 당시 주소는 평안남도 대동군 율리면 추빈리였다. 그 후 평양이 확장되어 지금은 평양시 역포구역 추당리가 되었다. 이 마을은 당시 평양에서 동쪽으로 12킬로미터쯤 떨어져 있었는데, 가래나무가 많아 가락골이라고 했고, 의령(宣寧) 남(南)씨가 많이 모여 살아 ‘남가락골’이라 불렸다. 추빈리의 ‘추빈(楸斌)’도 가래나무(楸)가 빛난다(斌)는 뜻이다.

가락골은 평양과, 율리면사무소가 있는 무진마을을 잇는 큰길을 사이에 두고 윗동네와 아랫동네로 나뉘었다. 아랫동네가 남씨 집성촌이고 윗동네에는 다른 성씨들이 모여 살았다. 나는 방학이나 명절마다 가락골에 갔어도 윗동네에 가본 적은 없다. 가락골의 아래위 동네를 합하면 200가구가 넘었을 것이다. 시골치고 꽤 큰 마을이었다. 당시 평양인구가 10만이 될까 말까 했다.

남가락골의 대가족. 1923년 신무리 큰할아버지의 회갑잔치 때. 왼쪽 아래 같은 옷을 입고 있는 두 아이가 나와 기섭이 형이다

가락골은 서쪽이 트인 분지에 동서로 길게 뻗어 있었다. 남쪽에는 남산이라 부르는 야트막한 산이 있었고 북쪽에도 언덕이 있었다. 남산에는 우리 집안 선산이 있었다. 남쪽에 있어 남산도 되고 남씨 집안 선산이 있어 남산이 되기도 했다.

어릴 때 평양에서 가락골에 갈 때는 북쪽 언덕을 넘으면 빨랐다. 언덕마루에 오르면 동네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그때까지 걷느라고 아팠던 다리가 시원해지고 기분도 상쾌해지곤 했다. 남쪽은 탁 트여서 평야를 이루었는데 멀리 노(盧)씨네 논재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거리가 20리쯤 되어 보이는 평야는 대부분 밭이었다.

논은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강 하류에 있었다. 논이 거의 없는 가락골에서는 쌀이 귀하고 잡곡은 그나마 풍족한 편이었다. 특히 품질 좋은 조(좁쌀)가 많이 났다. 나도 어렸을 때 조밥을 많이 먹었는데 어머니가 정성스레 좁쌀로 쑤어 주신 미음은 맛이 일품이었다.

◆ 남기동 선생은...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100살이다. 일본 제6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신생 이공학부 응용화학과에 편입했다. 1946년 중앙공업연구소 지질광물연구소장, 요업 과장으로 근무하며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 등에도 출강했다. 부산 피난 중에도 연구하며 공학도들을 가르쳤다. 6·25 후 운크라 건설위원장을 맡아 1957년 연산 20만 톤 규모의 문경시멘트공장을 건설했다. 화학과장, 공업국 기감(技監)으로 인천판유리공장, 충주비료공장 등 공장 건설 및 복구사업을 추진했다. 1960년 국내 대학 최초로 한양대에 요업공학과를 창설하고 학과장을 맡았다. 1962년 쌍용양회로 옮겨 서독 훔볼트의 신기술 ‘SP킬른(Kiln)’ 방식으로 1964년 연산 40만 톤 규모의 영월공장을 준공했는데, 최단 공사기간을 기록해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영월공장 준공으로 우리나라는 시멘트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1968년 건설한 동해공장은 단위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공장 증설을 거듭해 1992년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량은 세계 5위가 되었다. 1978년 동양시멘트로 자리를 옮겨 2차 오일쇼크 때 시멘트 생산 연료를 벙커씨유에서 유연탄으로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 특허 대신 공개를 택해 업계를 위기에서 살려냈다. 이 공적으로 1981년 '3·1 문화상(기술상)'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 요청으로 1992년 인도네시아 최초의 시멘트공장인 '시비뇽 시멘트플랜트(P.T. SEMEN CIBINONG)'를 건설했다. 한국요업(세라믹) 학회, 한국화학공학회, 대한화학회등 3개 학회, 대한요업총협회(지금의 한국세라믹총협회) 회장으로 학계와 산업계의 유대를 다졌다. 학교, 연구소, 산업체가 참석하는 '시멘트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를 조직해 학술교류는 물론 민간교류에도 힘썼다. 세라믹학회는 그의 호를 따 장학지원 프로그램인 '양송 상'을 제정했다. 1993년 인하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2006년 서울대 설립 60돌 기념 '한국을 일으킨 60인' 상, 2007년 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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