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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특강★시민의 인성] 강신익 교수③ 본성도 길러진다

[뉴스비전e] 인간다운 성품과 역량을 키워 행복과 정의를 실현하려면 먼저 인간의 본바탕인 성품을 옳게 이해해야 하는데, 이 문제는 대체로 두 개의 질문을 중심으로 논의된다.

첫째는 인간의 본바탕이 선한지 악한지 또는 이기적인지 협동적인지의 물음이고, 둘째는 인간 본성이 타고나는 것인지 길러지는 것인지의 물음이다. 이 두 질문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논의가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이다. 

순자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사람의 본성은 악한데, 선해짐은 인위仁義때문이다.” 반면에 맹자는 사람은 누구나 착한 본성을 타고나지만 그것이 아직 길러지지 않은 상태에서 나쁜 행위에 물들게 되면 악해진다고 한다. 맹자는 타고나는 선한 본성을 인간만의 것으로 보고 동물과 인간을 구별한다. 순자는 자연상태의 인간에게는 선도 악도 없지만 다른 것과 관계를 맺으면서 악해진다고 본다. 맹자가 말하는 착한 본성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지만 순자의 악한 본성은 후천적이고 사회적인 것이다.

맹자의 본성이 내재적이라면 순자의 그것은 외재적이다. 맹자의 본성은 자연의 속성이지만 순자의 본성은 양육의 결과다. 맹자는 사람의 선한 본성을 그대로 드러나게 함으로써 인의를 구현할 수 있다고 본 반면, 순자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자연에 인위적人爲的 노력을 더해야 인의를 실천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이 두 주장이 우리의 관심사인 인성교육과 맺을 수 있는 관계가 드러난다. 앞서 말했듯이 인성 ‘교육’은 인위적 노력을 전제로 한 말이므로 논리적으로 맹자보다는 순자의 주장에 가깝다. 즉, 고대의 순자와 현대의 인성교육은 선한 본성의 육성이 아닌 악한 본성의 교정을 그 목표로 한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물론 맹자가 인위적 노력이 필요 없다고 한 적은 없다. 그도 순자와 마찬가지로 인위적인 예의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고 그렇게 실천했다. 하지만 착한 본성을 가꾸기 위한 인위와 악을 제압하기 위한 인위가 같을 수는 없다.   

고대 중국에서 선과 악, 본성자연과 인성양육을 둘러싸고 벌였던 논쟁의 양 당사자들은 인의仁義를 구현한 왕도정치라는 공통의 목표를 갖고 있었다. 이 논쟁은 19세기 유럽에서 다시 재현되는데 이번에는 정치와 철학이 아닌 과학이 그 재료였다.

이 논쟁에서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만의 선한 본성이 있다는 주장은 유지되기가 어려웠다. 다윈의 진화론에 따르면 모든 생명체는 공통의 조상으로부터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면서 진화해 온 존재들이며 진화의 동력은 생존과 번식을 두고 벌이는 경쟁일 뿐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진화의 수많은 결과 중 하나인 생명체라면 그래서 생존경쟁의 가치를 체현한 존재라면 그 타고난 본성에 초자연적인 선善이 주입될 논리적 필연성이 사라진다. 고대 중국의 논쟁이 왕도정치라는 궁극의 가치를 중심에 둔 목적론적 논쟁이었다면, 19세기 유럽의 논쟁은 인간이 아닌 수많은 생명체에 대한 경험적 연구에 바탕을 둔 과학적 성과가 인간의 정치사회 영역으로 확산되면서 벌어진 현상의 일부였다. 당시 세계는 유럽의 자본주의 열강들이 경쟁적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자원과 민중을 수탈하던 시기였다. 

생존과 번식을 위한 경쟁이라는 자연선택의 법칙은 즉시 적자생존適者生存으로 해석되었으며 약육강식弱肉强食으로 실천되었다. 다윈 자신은 자신이 발견한 자연의 법칙을 인간사회에 확대 적용할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사회진화론자로 불리는 그의 추종자들은 그 법칙을 바로 인간과 경제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원리로 차용했다. 그것이 자신들의 침략과 수탈을 정당화해 줄 최적의 논리였기 때문이다. 

맹자는 동물과 구분되는 인간만의 선한 본성을 강조했고, 순자는 타고난 천성에는 선악이 없지만 잘못된 사회환경이 인간을 악하게 한다고 했지만, 사회진화론자들은 인간도 동물과 마찬가지로 악하게 이기적으로 태어난다고 가정했다. 영국의 다윈은 주로 자원이 풍부해 다양한 생물들이 복잡한 관계를 만들어가며 살아가는 적도 지역에서 연구를 수행했지만 러시아의 크로포트킨은 척박한 기후와 환경을 가진 시베리아 툰드라 지역의 자연현상을 관찰했다. 

그 결과 다윈과는 전혀 다른 자연법칙을 발견했다. 척박한 환경을 살아가는 생물들은 우리가 혹독한 추위를 만났을 때 서로의 체온에 의지해 생존가능성을 높이듯이 경쟁보다는 협동을 통해 환경에 맞서는 전략을 구사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 논리를 미개인과 야만인 사회, 중세와 근세 사회의 다양한 상호부조 활동에까지 적용해 설명한다.

크로 포트킨은 인간의 본성이 선하거나 악하지 않다고 본 점에서는 순자와 같지만, 나쁜 환경이 본성을 악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협동을 강제한다고 본 점에서 크게 다르다. 물론 인간을 악하게 만드는 순자의 환경은 인간사회의 것인 반면 크로포트킨의 그것은 자연환경이라는 큰 차이는 있다. 

다윈의 진화론은 이후 그것을 검증할 다양한 과학적 연구방법들에 힘입어 그 진실성이 입증되고 있지만, 연구결과들이 축적되면서 그것이 논의되는 과학의 맥락과 우리가 사는 세상 자체가 달라짐에 따라 논쟁의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분자생물학에 근거한 유전학의 발전, 그리고 2차대전 이후 크게 신장된 인권의식과 냉전 이후 급격한 경제성장을 거치면서 각성된 시민의식이 그 배경이다. 

1980년대 이후 강화된 신자유주의 질서와 자본을 옹호하는 쪽에서는 인간의 이기적 속성을 자연법칙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그 결과 초래된 불평등의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쪽에서는 연대와 상호부조라는 인간의 사회적 속성을 더 본질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각각의 주장에는 다윈경쟁과 자연선택과 크로포트킨척박한 환경에 대한 공동대응의 논리가 그대로 담겨있다. 여기서 문제는 자연질서가 사회질서보다 본질적이라는 우리의 직관이다. 우리는, 자연은 우리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고 사회는 그런 자연의 본성을 지닌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차적 구성물이라고 여긴다. 

자연과 사회, 본성과 양육, 몸과 마음의 쌍에서 자연-본성-몸은 일차적이고 사회-양육-마음은 이차적이다. 앞에서 제기했던 두 가지 질문-인간의 본바탕이 선인지 악인지와 인간 본성이 선천인지 후천인지도 사실은 이와 같은 이분법을 전제로 한 것이다. 우리의 의식 속에서는 선과 악, 선천과 후천을 뚜렷이 구분하려는 무의식이 작동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오래된 논쟁이 사실은 선과 악, 선천과 후천이라는 잘못된 구분법 때문에 생긴 것이라면? 선과 악이 둘로 나뉜 실재라기보다 상황에 따라 달리 발현되는 동일한 실재의 서로 다른 속성일 뿐이라면? 본성이란 것이 태어나는 순간 가지고 있는 어떤 속성이라기보다 진화와 발달이라는 생물학적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변해가는 속성이라면? 그렇다면 우리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전혀 다른 담론을 구성해야만 한다.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유전학, 면역학, 진화생물학, 인지과학 등의 축적된 연구결과들 은 본성과 양육, 선과 악, 몸과 마음에 대한 전혀 새로운 설명을 내놓고 있다. 이 설명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은 타고나는 것만도 아니고 후천적으로 길러지는 것만도 아니다. 그것은 생명으로서의 인간이 수십억 년 동안 진화해 오면서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되었기에 살아남은 속성들의 총체일 뿐이다. 

그것은 어떤 지향의 힘을 가지고 있을 수는 있지만 고정된 속성일 수는 없다. 그것을 선과 악으로 나눌 수도 없다. 생명은 연속이고 과정이며 영원히 회귀한다. 21세기 생물학은 마치 대립적인 것처럼 여겨졌던 본성과 양육자연과 문화, 선과 악, 몸과 마음의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관계를 찾아 나선다. 

그 결과 도출된 것이 ‘양육을 통한 본성Nature via Nurture’이라는 관계 도식이다. 생명은 선천적으로 타고 난 불변의 본성에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이웃하는 다른 생명들과의 관계 또는 전체 생태계에서의 위치와 역할에 따라 끊임없이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과정적 존재라는 것이다. 과정으로서의 본성이라는 개념은 유전학, 면역학, 인지과학, 의학 등 다양한 생물학 분야에서 도출되고 있지만, 후성 유전학으로 가장 쉽게 설명할 수 있다. 후성유전학epigenetics에 따르면 유전자는 더 이상 생명체의 운명이 아니다. 유전자는 그것이 들어있는 세포 안팎의 환경에 따라 발현되기도 발현되지 않기도 한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생명은 DNA로 구성된 유전자뿐 아니라 이렇게 후성적으로 발현된 형질까지 후손에 전한다는 사실도 발견되었다. 유전은 그 속에 이미 환경을 포함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본성은 그 속에 이미 양육의 조건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학문, 예술, 체육을 스스로의 본성을 생산하는 활동phusiopoiesis13)으로 여기는 존재의 미학을 실천했던 고대 그리스 인의 지혜가 초월적 신이 지배하던 중세와 합리적 이성의 시대였던 근대를 건너뛰어 21세기에 이르러서야 첨단 생명 과학을 만나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는 듯하다.
 

 

◆ 강신익 교수는...

부산대 교수(치의학전문대학원 의료인문학교실). 추상적 지식보다는 일상적 삶에 봉사하는 의학을 지향한다. 경기도 안양에서 나고 자라면서 농촌에서 도시로 변해가는 삶의 터전을 온몸으로 느끼며 살았다. 서울대 치과대학을 졸업하고 15년간 치과의사로 일했다. 마흔이 되던 해 영국으로 건너가 2년간 의학 관련 철학과 역사를 공부했다. 2000년부터 일산백병원 치과 과장으로 일하면서 의과대학생을 대상으로 의료인문학을 가르쳤고, 2004년 인문의학교실을 개설해 전임교수가 되었다. 2013년 가을부터 부산대 치의학전문대학원으로 자리를 옮겨 ‘인문학적 의료’를 공부하고 가르친다. 특히 과학적 사실과 인문학적 가치와 의미를 연결하고 종합하는 공부에 몰두하고 있다. 2007년부터 3년간 정부 지원으로 인문의학연구소를 개설해 <건강한 삶을 위한 인문학적 비전>이라는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인문의학》 시리즈 3권을 펴냈다. 지은 책으로는 《몸의 역사 몸의 문화》, 《몸의 역사》, 《의학 오디세이》 (공저), 《생명, 인간의 경계를 묻다》(공저), 《찰스 다윈 한국의 학자를 만나다》(공저), 《불량유전자는 왜 살아남았을까》 등이 있고 역서로는 《공해병과 인간생 태학》, 《사회와 치의학》, 《환자와 의사의 인간학》, 《고통받는 환자와 인간에게서 멀어진 의사를 위해》 등이 있다.

강신익 교수  medhum@pu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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