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비전e] 물컵에 물이 반 차 있다. 부정적인 사람은 “반밖에 없다” 하고, 긍정적인 사람은 “반이나 있다”고 한다.

우리가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은 감사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100년의 삶을 돌아보면 힘든 일도, 안타깝고 억울한 일도 많았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건강하게 오래 살았고 고생스럽긴 했지만 국가경제발전에 기여도 했고, 자손들도 열심히 공부하고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으니 감사할 뿐이다.

일찍이 나를 낳아 기르고 공부까지 시켜준 부모님께 감사하고, 평생을 바깥일에 몰두한 가장을 대신해 살림을 책임지고 아이들을 훌륭하게 길러낸 아내에게 감사하고, 큰 문제 없이 열심히 잘 자라 자기 분야에서 역할을 다한 6남매에게 감사하다.

나에게 공학도로서 요업에 눈을 뜨게 지도해주신 은사들께 감사하며 내가 배운 것을 가르쳐 줄 수 있도록 배려해 준 대학들, 특히 한양대에 감사하다. 또 내가 연구한 모든 것이 산업계에 적용되어 경제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직무를 맡기고 지지와 격려를 보내준 연구소와 기업들에 감사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의지와 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로 최고가 되는 것이다. 최선을 다했으면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한다. 어떤 환경이나 조건에서도 최선을 다했다면 그 결과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감사다.

감사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행복한 삶이다. 사람들은 어떻게 백년이라는 오랜 삶을 살아오면서 미소를 잃지 않을 수 있는지 궁금해 한다. 그 비결은 매사에 감사하는 것이다. 하루하루 감사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면 미소는 자연스럽게 나오게 마련이다.

하고 싶은 일이 잘 안 되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할 수 있는 데까지 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해야 한다.

하고 싶은 것 중에서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없는 것까지 하려고 든다면 좌절감만 맛보고 말 것이다. 하고 싶다고 해서 해서는 안 되는 일까지 하려고 든다면 불행해지고 말 것이다.

일본인 친구 중에 야쿠르트 오너의 아들이 있다. 오래 전 이야기지만, 그 친구가 나에게 한국에서 야쿠르트 사업을 할 수 있도록 라이선스를 주겠다고 제안한 적이 있다. 나는 잠시도 고민하지 않고 사양했다. 훗날 이 얘기를 들은 사람들이 무척이나 아쉬워하며 만약 그때 그 일본 친구의 제안을 수락했다면 지금쯤 재벌이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당시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돈 버는 일에는 취미가 없었다.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나 같은 사람이 돈 버는 일에 취미가 있었다면 돈을 버느라고, 번 돈을 지키느라고 정작 내가 하고 싶고 해야 할 일은 하나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100년 인생을 살아보니 행복이란 별 게 아님을 알게 되었다. 욕심을 버리고 현재에 만족하고 만사에 감사하는 것이다.

 

◆ 남기동 선생은...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100살이다. 일본 제6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신생 이공학부 응용화학과에 편입했다. 1946년 중앙공업연구소 지질광물연구소장, 요업 과장으로 근무하며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 등에도 출강했다. 부산 피난 중에도 연구하며 공학도들을 가르쳤다. 6·25 후 운크라 건설위원장을 맡아 1957년 연산 20만 톤 규모의 문경시멘트공장을 건설했다. 화학과장, 공업국 기감(技監)으로 인천판유리공장, 충주비료공장 등 공장 건설 및 복구사업을 추진했다. 1960년 국내 대학 최초로 한양대에 요업공학과를 창설하고 학과장을 맡았다. 1962년 쌍용양회로 옮겨 서독 훔볼트의 신기술 ‘SP킬른(Kiln)’ 방식으로 1964년 연산 40만 톤 규모의 영월공장을 준공했는데, 최단 공사기간을 기록해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영월공장 준공으로 우리나라는 시멘트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1968년 건설한 동해공장은 단위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공장 증설을 거듭해 1992년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량은 세계 5위가 되었다. 1978년 동양시멘트로 자리를 옮겨 2차 오일쇼크 때 시멘트 생산 연료를 벙커씨유에서 유연탄으로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 특허 대신 공개를 택해 업계를 위기에서 살려냈다. 이 공적으로 1981년 '3·1 문화상(기술상)'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 요청으로 1992년 인도네시아 최초의 시멘트공장인 '시비뇽 시멘트플랜트(P.T. SEMEN CIBINONG)'를 건설했다. 한국요업(세라믹) 학회, 한국화학공학회, 대한화학회등 3개 학회, 대한요업총협회(지금의 한국세라믹총협회) 회장으로 학계와 산업계의 유대를 다졌다. 학교, 연구소, 산업체가 참석하는 '시멘트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를 조직해 학술교류는 물론 민간교류에도 힘썼다. 세라믹학회는 그의 호를 따 장학지원 프로그램인 '양송 상'을 제정했다. 1993년 인하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2006년 서울대 설립 60돌 기념 '한국을 일으킨 60인' 상, 2007년 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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