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비전e] 해방과 동시에 일본인 교수가 본국으로 떠나면서 내게 자신이 오랜 기간 수집한 우표들을 선물로 주었다. 구한말에 발행된 우표부터 조선과 일본에서 발행된 수천 점의 우표가 있었다.

그 선물을 받고부터 우표수집은 나의 취미가 되었다.

아이들과도 함께 우표를 모으기 시작했다. 새 우표가 발행되었다는 소식이 들리면 아이들이 광화문에 있던 중앙우체국 앞에 가서 줄을 서서 기다렸다. 우표를 사 오는 것이 특별한 기쁨이었다. 처음엔 한 장 한 장 모으다가 나중엔 전지로 모으게 되었다.

우표수집은 그냥 단순한 취미활동 이상이다. 한 장 한 장 모아서 우표책에 꽂아 넣는 일련의 과정이 정리하는 기쁨을 만끽하게 해주기도 하지만 무엇인가를 수집하는 일은 당장 그때뿐이 아니라 시간의 의미를 깨우쳐 주는 놀라운 작업이다.

새로 발행된 우표는 당시에는 그리 큰 값어치가 있진 않지만, 한 해 두 해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가 커지게 된다. 그냥 모아두고 차곡차곡 정리만 해두고 간직했을 뿐인데도 우표의 가치가 커지는 것은 오로지 시간의 힘 덕분이다.

1960년대 화폐개혁이 단행되었을 때 정부는 일정 기간을 두고 그 안에 구화폐 ‘환’을 가져오면 신화폐 ‘원’으로 바꾸어주겠다고 했다. 집집마다 구화폐를 동전까지 찾아내 새 돈으로 바꾸었다. 우리 집도 마찬가지였다. 정부가 제시한 기간 안에 환전하지 못한 구화폐는 휴지 조각이 되고 말 것을 다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푼이라도 손해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눈을 씻고 집 안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져 동전 하나까지 챙겼다.

그런데 화폐개혁이 끝나고 나서 한참 뒤에 비상시를 대비해 장롱 깊숙이 넣어두었던 금고에 지폐뭉치가 여러 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우리 식구는 모두 허탈했다. 하지만 아내의 절약과 저축정신을 탓할 수는 없었다. 나는 이것도 추억이라며 버리지 말고 잘 간직해두자고 했다. 우표수집도 하는데 화폐수집도 같이 한다 생각하고 잘 모셔두었다.

50년도 더 지난 어느 날, 둘째아들 세현이가 신문에서 보았다며 나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주었다. 화폐개혁 이전에 쓰이던 환화가 희소성이 커져 그 감정가가 당시 실제 환율보다도 많게는 수백 배로 커졌다는 것이다.

그 옛날 뒤늦게 지폐뭉치를 발견했을 때 휴지 조각이라고 생각하고 버렸다면 50년 후에 또 한 번 큰 후회를 할 뻔했던 것이다. 함께 수집해 두었던 온갖 채권도 어마어마한 감정가를 받았다. 당시에는 일본인들이 그냥 버리고 간 종이쪼가리에 불과했는데 말이다.

도대체 무엇이 이런 기적을 만든 것일까. 바로 시간이다. 시간의 힘은 이처럼 위대하다.

시간은 인내심이다. 사막을 걷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언젠간 오아시스가 나타날 것이라는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것이다. 마치 시곗바늘이 한 눈금 한 눈금 째깍째깍 지나가듯 말이다. 그러다 보면 시계가 돌아가 어느 시각에 도달하듯 오아시스를 만나게 될 것이다. 사막을 걷는 사람이 오아시스에 도달하기 전에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더위와 갈증 때문이 아니다. 인간이 지닌 조바심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인생이라는 험난한 사막을 걷고 있다. 어떤 사람은 언젠간 반드시 오아시스가 나타날 것이라고 믿고 묵묵히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지만, 어떤 사람은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도대체 언제 오아시스가 나타나는 거야?”, “오아시스가 있기는 한가?” 하고 불평한다. 그러다 모래바람이 한 차례 불어닥치기라도 하면 “더는 못 가겠다”고 주저앉고 만다. 시간이 지나면 모래바람은 잦아들고 저 멀리 오아시스가 나타날 텐데 말이다.

시간은 세상에서 가장 효력 있는 약이다.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쏟아지는 슬픔도 시간이 지나면 안정을 되찾는다. 화를 참지 못해 이리저리 분풀이를 하던 사람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진정하게 된다. 아무리 슬픈 일을 당한 사람이라도, 도저히 참을 수 없다며 화를 내는 사람이라도 눈앞에 시계를 갖다 놓고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울거나 화낼 수 있는지 시간을 재어보라고 하면 금세 슬픔과 분노에서 벗어날 것이다.

나의 맏며늘아기도 우리 집에 처음 시집 왔을 때는 무척이나 힘겨워했다. 시집살이가 고되어서라기보다는 평안도 가풍의 시집과 남쪽 친정의 문화적인 차이가 너무 커 적응하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힘들어하는 며늘아기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한마디뿐이었다.

“아가, 조금만 더 참아 보거라.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당시에 며늘아기는 무슨 뜻인지 모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아무런 해결책도 알려주지 않고 시간에 떠넘기는 시아버지가 야속하게 여겨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훗날 며늘아기가 내게 말했다. 정말로 시간이 해결해 주었다고.

성경에도 시간의 묘약에 대한 말씀이 나온다. 다윗왕이 전쟁에 나가 승리하면 자만에 빠져 다음 전쟁에서 방심하다 패하고, 전쟁에서 패하면 의기소침해져 다음 전쟁에 나가기가 두려워지는 것이 반복되었다.

다윗 왕은 세공사를 불러 이겼다고 자만에 빠지지 않고 졌다고 실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문구를 팔찌 안쪽에 새겨오라고 명했다. 도무지 그런 문구가 떠오르지 않았던 세공사는 지혜롭기로 소문난 솔로몬 왕자를 찾아가 아이디어를 구했다. 솔로몬 왕자가 알려준 문구는 바로 이것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우리가 운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 타이밍이다. 헛되이 보내지만 않으면 시간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선물해 준다. 일희일비하지 말라.

6・25가 끝나고 피난 갔던 부산에서 돌아와 보니 서울은 잿더미나 다름없었다. 만일 그때 좌절했다면 우리가 어떻게 오늘날 경제대국 10위권의 국가가 될 수 있었겠는가.

 

◆ 남기동 선생은...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100살이다. 일본 제6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신생 이공학부 응용화학과에 편입했다. 1946년 중앙공업연구소 지질광물연구소장, 요업 과장으로 근무하며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 등에도 출강했다. 부산 피난 중에도 연구하며 공학도들을 가르쳤다. 6·25 후 운크라 건설위원장을 맡아 1957년 연산 20만 톤 규모의 문경시멘트공장을 건설했다. 화학과장, 공업국 기감(技監)으로 인천판유리공장, 충주비료공장 등 공장 건설 및 복구사업을 추진했다. 1960년 국내 대학 최초로 한양대에 요업공학과를 창설하고 학과장을 맡았다. 1962년 쌍용양회로 옮겨 서독 훔볼트의 신기술 ‘SP킬른(Kiln)’ 방식으로 1964년 연산 40만 톤 규모의 영월공장을 준공했는데, 최단 공사기간을 기록해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영월공장 준공으로 우리나라는 시멘트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1968년 건설한 동해공장은 단위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공장 증설을 거듭해 1992년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량은 세계 5위가 되었다. 1978년 동양시멘트로 자리를 옮겨 2차 오일쇼크 때 시멘트 생산 연료를 벙커씨유에서 유연탄으로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 특허 대신 공개를 택해 업계를 위기에서 살려냈다. 이 공적으로 1981년 '3·1 문화상(기술상)'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 요청으로 1992년 인도네시아 최초의 시멘트공장인 '시비뇽 시멘트플랜트(P.T. SEMEN CIBINONG)'를 건설했다. 한국요업(세라믹) 학회, 한국화학공학회, 대한화학회등 3개 학회, 대한요업총협회(지금의 한국세라믹총협회) 회장으로 학계와 산업계의 유대를 다졌다. 학교, 연구소, 산업체가 참석하는 '시멘트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를 조직해 학술교류는 물론 민간교류에도 힘썼다. 세라믹학회는 그의 호를 따 장학지원 프로그램인 '양송 상'을 제정했다. 1993년 인하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2006년 서울대 설립 60돌 기념 '한국을 일으킨 60인' 상, 2007년 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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