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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시멘트산업의 살아있는 역사] 남기동 회고록(21) Together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뉴스비전e] 나는 밖에 나갈 때 내 주머니에 지니고 있는 돈은 내 돈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차비와 밥값만 있으면 되었고 나머지는 필요한 사람에게 아낌없이 주었다. 빌려주기도 하고 그냥 주기도 했다.

빌려줄 때도 받지 못한다 해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주었다. 친구와는 돈거래를 하지 않는 것이 맞다고들 한다. 나중에 돈도 잃고 친구도 잃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친구에게 돈을 빌려줄 때 나중에 돌려받지 못한다고 해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빌려주면 돈은 잃어도 친구는 잃지 않을 수 있다.

나에게 불필요한 것을 하나 더 가지게 되면 누군가에게 필요한 것이 하나 부족하게 된다. 내가 더 가질수록 누군가는 덜 가지게 되는 것이다.

나는 조카들 중에 형편이 어렵거나 곤경에 처한 아이들이 있으면 자식처럼 돌보아 주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읜 조카들도 있었다. 나의 아이들에게는 “너희는 그래도 부족함 없이 지내고 있지만, 사촌들은 지금 도움이 필요하잖아.” 하고 이해를 구했다.

먼 훗날 그 조카들이 어려움을 딛고 잘 성장해 제 몫을 톡톡히 해내는 것을 볼 때마다, 또 그때 일을 잊지 않고 감사를 표할 때마다 나는 그때 그러길 참 잘했다고 생각한다. 나만 잘 되고, 내 가족만 잘 되었다면 그렇게 함께 정을 나눈 행복은 끝내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1943년 경성제대 이공학부 응용화학과를 1회로 졸업했다. 당시 요업을 전공한 학생은 나뿐이었다. 일제가 패망하면서 일본인 공학도들이 모두 떠났다. 요업분야에는 함께 연구할 사람도 일할 사람도 거의 없었다. 일본인 교수들이 남기고 간 요업 관련 서적들이 전부였다.

나와 뜻을 같이한 요업인들은 한 명이라도 더 함께할 사람들을 찾아야 했다. 연구소 일로 바쁜 중에도 우리는 틈틈이 대학에 출강하고 연구실에 데려와 실습하게 하면서 지식의 불씨를 살려 나갔다. 학회를 만들고 협회를 결성하고 산학연계로 머리를 맞대고 기술개발에 매달렸다.

지식이란 불씨와 같다. 나만 가지고 있을 때는 한낱 현학적인 자랑으로 반짝 빛날지 모르지만 금세 꺼지고 만다. 하지만 지식을 여러 사람과 나누게 되면 불길이 번져 장작불처럼 활활 타오른다. 학교와 연구소가 지식의 불씨를 틔우는 화로라면 학회와 협회는 지식의 불씨를 활활 타오르게 해서 쇳덩이도 녹이는 용광로라고 할 수 있다.

심포지엄을 만들어 국내 업계는 물론 해외 선진 업계까지 초청해 함께 지식을 나누자고 한 것도 그런 취지에서였다. 지금 우리나라 요업계, 시멘트업계의 기적 같은 성장은 바로 그런 지식 공유의 노력이 만들어낸 역작이라고 할 수 있다. 1 더하기 1은 2보다 크다는 시너지효과를 우리는 충분히 체감했다.

협동이라는 것도 그런 것이다. 시멘트공장에서 일할 때 우리 직원들은 2교대로 근무했다. 밤을 새워 근무한 직원들은 피로를 풀기 위해 공장 아래에 있는 계곡에서 멱을 감았다. 목만 내놓고 목욕을 하다가도 저 위에 공장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의 색깔에 주목했다. 뽀얀 연기가 나오면 안심이지만, 혹시라도 시커먼 연기가 나오기라도 하면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공장으로 뛰어올라가곤 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도 동료들이 힘들어할까봐 힘을 보태려고 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시멘트강국이 된 것은 그런 함께하는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나는 내가 속한 회사에서 개발한 신기술에 대해 특허를 내는 것을 원치 않았다. 사람들은 나를 바보 같다고 생각했을 테지만, 바보 같은 사람이 특허 낼 만한 기술을 개발할 수 있었겠는가.

나는 특허를 내는 대신 다른 기업들에 이 신기술을 공유해 그들과 함께 더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내길 바랐다. 자기가 개발한 기술이라고 움켜쥐고 자기 회사만 잘 되면 된다는 생각으로 경영하면 업계가 망하고 나라 경제가 휘청대고 결국 자기 회사도 문을 닫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지식의 불씨를 스스로 꺼뜨리는 바보 같은 짓이다.

혼자보다 함께가 더 멀리 갈 수 있고, 더 강해질 수 있고,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대한민국 요업의 발전사를 살아보면서 절실하게 깨달았다.

인도네시아에 시멘트공장을 지어 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나라가 40년에 걸쳐 힘들게 쌓은 기술을 왜 다른 나라에 전수해주느냐고 생각했다면 아무리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요청했다고 해도 거절했을 것이다.

먼저 배운 나라가 나중에 배우려고 하는 나라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마땅하다. 우리도 그러지 않았는가. 시멘트를 아는 사람도, 시멘트를 수입할 돈도, 시멘트공장을 지을 기술과 자금도 없던 시절이 있지 않았던가. 우리도 운크라 자금을 얻어다 문경시멘트공장을 짓지 않았던가.

개구리도 올챙이 적 생각은 할 것이다. 어려울 때 받기만 하고 나중에 어려운 나라에 돌려줄 줄 모르는 나라는 국제사회에서 비난받고 외면 받을 수밖에 없다. 더구나 인도네시아에 우리 건설사가 우리 기술로 참여한다는 것만으로도 나눔의 효과는 충분하지 않았던가.

사람과 사람이 함께하듯 나라와 나라도 함께할 때 인류가 행복해질 수 있다. 강대국은 계속 강해지려고 하고, 약소국은 계속 약해지기만 하면 결국 인류 전체의 파멸로 가고 말 것이다.

 

◆ 남기동 선생은...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100살이다. 일본 제6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신생 이공학부 응용화학과에 편입했다. 1946년 중앙공업연구소 지질광물연구소장, 요업 과장으로 근무하며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 등에도 출강했다. 부산 피난 중에도 연구하며 공학도들을 가르쳤다. 6·25 후 운크라 건설위원장을 맡아 1957년 연산 20만 톤 규모의 문경시멘트공장을 건설했다. 화학과장, 공업국 기감(技監)으로 인천판유리공장, 충주비료공장 등 공장 건설 및 복구사업을 추진했다. 1960년 국내 대학 최초로 한양대에 요업공학과를 창설하고 학과장을 맡았다. 1962년 쌍용양회로 옮겨 서독 훔볼트의 신기술 ‘SP킬른(Kiln)’ 방식으로 1964년 연산 40만 톤 규모의 영월공장을 준공했는데, 최단 공사기간을 기록해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영월공장 준공으로 우리나라는 시멘트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1968년 건설한 동해공장은 단위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공장 증설을 거듭해 1992년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량은 세계 5위가 되었다. 1978년 동양시멘트로 자리를 옮겨 2차 오일쇼크 때 시멘트 생산 연료를 벙커씨유에서 유연탄으로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 특허 대신 공개를 택해 업계를 위기에서 살려냈다. 이 공적으로 1981년 '3·1 문화상(기술상)'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 요청으로 1992년 인도네시아 최초의 시멘트공장인 '시비뇽 시멘트플랜트(P.T. SEMEN CIBINONG)'를 건설했다. 한국요업(세라믹) 학회, 한국화학공학회, 대한화학회등 3개 학회, 대한요업총협회(지금의 한국세라믹총협회) 회장으로 학계와 산업계의 유대를 다졌다. 학교, 연구소, 산업체가 참석하는 '시멘트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를 조직해 학술교류는 물론 민간교류에도 힘썼다. 세라믹학회는 그의 호를 따 장학지원 프로그램인 '양송 상'을 제정했다. 1993년 인하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2006년 서울대 설립 60돌 기념 '한국을 일으킨 60인' 상, 2007년 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남기동  news@nv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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