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비전e] 역지사지(易地思之). 상대와 입장을 바꾸어놓고 생각하면 이해하지 못할 일이 없다. 어떤 일을 할 때 나에게 열 가지가 이득이 된다고 해도 다른 누군가에게 한 가지라도 해가 된다면 그 일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한을 남기면 그것은 언제든 나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게 마련이다. 인간관계는 만 명의 친구를 만드는 것보다 한 사람의 적을 만들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평양공립중학교에 다닐 때 겪은 일이다. 당시 평안도에 있는 16개 중학교가 참가하는 이어달리기 대회가 열렸다. 나는 일본인학교의 유일한 조선인으로 공부로도 1등이었을 뿐만 아니라 달리기도 교내에서 가장 빨랐다. 당연히 대표팀에 선발되어 세 번째 주자로 출전했다.

내가 바통을 이어받기 전에 우리 팀은 3위권이었지만, 내가 바통을 받고나서는 상황이 달라졌다. 한 사람, 두 사람을 제치고 선두로 내달리고 있는데 바로 그때 관중석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쪽바리놈, 죽어라!”

그 야유는 내 귀에 비수처럼 꽂혔다. 귀를 의심할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 잠시 주춤했지만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달리기 시작했다. 내 구간은 마저 뛰어야 했다. 바통을 다음 주자에게 넘겨주고 나서 나는 숨을 돌릴 틈도 없이 분한 마음에 조금 전 나를 향해 야유를 던졌던 관중석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범인으로 추정되는 어른에게 말했다.

“어찌 사람한테 죽으라고 할 수 있소?”

그러자 그 사람은 깜짝 놀라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당신 조선사람이었소? 평중에 조선사람이 있었단 말이오?”

나는 못내 분을 참지 못하고 따져 물었다.

“조선사람이든 일본사람이든 어찌 사람을 보고 죽으라고 할 수 있소?”

내가 거의 울먹이듯 항의하자 그 사람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어린 내게 머리를 숙여 사과했다.

“미안하게 됐소. 용서하오.”

사과를 받고 돌아서기는 했지만, 어린 마음에도 씁쓸함을 달랠 길이 없었다.

그날 이후 나는 한 가지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보지 않고 겉모습만 보고 판단해 남을 함부로 미워하거나 비난하는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인가. 나에게 저주를 쏟아낸 사람도 일제에 대한 적개심이 너무 컸던 나머지 평중에 다니면 무조건 일본인이고 일본인이면 선량한 학생이라도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조선학생이 아니라 일본학생이었다고 해도 상처를 받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나는 일본인학교인 평중에서도, 유학 간 일본 제6고등학교에서도 유일한 조선인 학생이었지만, 그 어떤 차별도 받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일본학생들 틈에서 설움을 받았을 거라며 안쓰러워했는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전혀 달랐다.

물론 두 학교 모두에서 일등을 놓치지 않아 일본학생들로부터 시기와 질투를 받아 따돌림을 당할 가능성도 충분했다. 하지만 나는 일본 학생들과 당당하게 실력으로 승부하되 교우관계에서만큼은 언제나 양보하고 겸손함을 잃지 않았다. 교우관계에서 언제나 호감을 주었고, 그때 쌓은 인맥은 해방 이후 일본과 기술을 교류하고 한・ 일외교에 기여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학창시절 이후 공직에서 대학에서 기업에서 중책을 맡아 일을 추진할 때도 나는 역지사지의 인간관계를 실천하려고 무척이나 애썼다. 나보다 좋은 학교를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전공한 요업이 생소해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함께 일하는 동료나 나에게 배우려는 이들에게 어떤 우월감 같은 것을 가지고 대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늘 상대의 입장에서 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그들 역시 그런 나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나는 지난 100년 동안 누구와 크게 다투어 본 적도 없다. 한번 알게 된 사람과는 친구가 되면 되었지 적이 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고 자부한다. 나는 특별히 미워하는 사람도 없었고, 누구에게 미움을 산 기억도 거의 없다.

주변에 적을 만들어 놓으면 인생은 늘 피로하고 불안하고 괴로워진다.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는 것도 못 견딜 일이지만,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은 더욱더 못할 짓이다.

사람을 평가하지 말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나이고 그는 그다. 나보다 잘난 사람인가, 못난 사람인가를 평가하지 말고,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 비교하지 말고 대등하게 대우해야 한다.

이런 인간관계의 원칙은 우리 집안의 가훈과도 같은 평등사상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우리 집안은 평양에서 대대로 집성촌을 이루어 살아온 양반가문이지만, 다른 집안과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달랐다. 그 시절엔 머슴도 여럿있었는데, 식사할 때는 모두 한 자리에 모여 함께했다. 집안사람이든 집에서 일하는 사람이든 말 그대로 식구(食口)라 생각하며 서로 존중했다.

그 시절 의대를 나와 고향에서 개업의로 인술을 펼치신 아버지는 환자에 귀천이 없듯 모든 사람은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셨다. 집안 어른, 아이, 머슴이 모두 겸상하고 화기애애하게 대화하며 식사하는 모습은 당시 이웃사람들에게는 무척이나 어색하고 납득하기 힘든 풍경이었다.

이런 가풍은 훗날 서울에 살 때도 이어져 운전기사나 가사도우미와도 한 자리에서 식사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우리 집에 초대되어 내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우리 집 운전기사나 가사도우미와 함께 겸상을 하고 돌아간 지인들 중에는 나중에 문제를 제기하거나 흉을 보는 이들도 없지 않았으나 나는 개의치 않았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 모든 사람은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나의 좌우명은 성실, 겸손, 사랑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다. 평등이란 사랑을 실현하는 것이다. 사랑한다면 누구든 평등하게 대해야 한다.

 

◆ 남기동 선생은...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100살이다. 일본 제6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신생 이공학부 응용화학과에 편입했다. 1946년 중앙공업연구소 지질광물연구소장, 요업 과장으로 근무하며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 등에도 출강했다. 부산 피난 중에도 연구하며 공학도들을 가르쳤다. 6·25 후 운크라 건설위원장을 맡아 1957년 연산 20만 톤 규모의 문경시멘트공장을 건설했다. 화학과장, 공업국 기감(技監)으로 인천판유리공장, 충주비료공장 등 공장 건설 및 복구사업을 추진했다. 1960년 국내 대학 최초로 한양대에 요업공학과를 창설하고 학과장을 맡았다. 1962년 쌍용양회로 옮겨 서독 훔볼트의 신기술 ‘SP킬른(Kiln)’ 방식으로 1964년 연산 40만 톤 규모의 영월공장을 준공했는데, 최단 공사기간을 기록해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영월공장 준공으로 우리나라는 시멘트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1968년 건설한 동해공장은 단위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공장 증설을 거듭해 1992년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량은 세계 5위가 되었다. 1978년 동양시멘트로 자리를 옮겨 2차 오일쇼크 때 시멘트 생산 연료를 벙커씨유에서 유연탄으로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 특허 대신 공개를 택해 업계를 위기에서 살려냈다. 이 공적으로 1981년 '3·1 문화상(기술상)'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 요청으로 1992년 인도네시아 최초의 시멘트공장인 '시비뇽 시멘트플랜트(P.T. SEMEN CIBINONG)'를 건설했다. 한국요업(세라믹) 학회, 한국화학공학회, 대한화학회등 3개 학회, 대한요업총협회(지금의 한국세라믹총협회) 회장으로 학계와 산업계의 유대를 다졌다. 학교, 연구소, 산업체가 참석하는 '시멘트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를 조직해 학술교류는 물론 민간교류에도 힘썼다. 세라믹학회는 그의 호를 따 장학지원 프로그램인 '양송 상'을 제정했다. 1993년 인하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2006년 서울대 설립 60돌 기념 '한국을 일으킨 60인' 상, 2007년 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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