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비전e] 물질적으로 검소하게 살고, 정신적으로 겸허하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이다.

건강은 결국 절제에서 온다는 것을 나는 몸으로 체험하며 100년을 살아왔다. 무엇이든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 너무 많이 먹으면 탈이 나게 마련이다. 약도 쓰면 쓸수록 부작용이 커진다. 넘치는 것보다는 조금 모자란 것이 차라리 낫다.

자기가 맡은 일에 충실한 사람은 행복하다. 몰입의 기쁨이 있어 다른 것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시간적으로나 정신적으로도 여유가 생긴다.

하나를 가지면 둘을 가지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이다. 물질적으로 욕심을 내기 시작하면 얼마쯤 부자가 될지 몰라도 정신적으로는 궁핍한 삶을 면하지 못한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이 물질에 집착하고 남들에게 함부로 대한다.

너무 많은 생각을 하는 것, 사안을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은 근심만 쌓이게 해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이다.

가끔은 생각을 버릴 줄도 알아야 한다. 남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뭐라고 비난하든 나에게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해나가면 된다. 사실 공부라는 것도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를 풀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돈을 쓸 시간이 없다. 절약이 부자를 만든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진리다.

돈을 벌기 위해서만 일하는 사람은 일의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일을 열심히 한 사람은 돈을 많이 벌지는 못할지라도 일의 의미와 가치를 찾을 수 있다.

회사를 경영하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실수 가운데 하나가 자신의 리더십으로 모든 직원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것은 자만을 넘어 교만이다. 직원들이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들어주고 직원들이 무엇을 힘들어하는지 세심하게 관찰하고 필요한 조치를 취해 개선하는 것이 경영자의 역할이자 존재이유라고 생각한다.

나는 경영자로 있을 때 얼마나 기술개발을 했는지, 그 결과 얼마나 성장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물론 내가 부임해서 퇴임할 때까지 회사 규모가 수십 배 넘게 커지고 생산량도 급증했지만 그것은 내가 한 일이 아니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직원들이 내 회사라 생각하고 허리띠를 졸라매고 먼지를 뒤집어쓰며 피땀 흘려 이룩한 결과다.

내가 한 일이라고는 그들이 조금이라도 덜 힘들게, 보람 있게 일할 수 있도록 지원해준 것뿐이다. 그들이 주연이었고 나는 조연에 불과했다.

하루는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할 때였다. 직원들이 줄을 서서 식판에 밥과 반찬을 받아와 먹는데, 젊은 직원들은 밥이 모자라 허기를 다 채우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자율배식으로 시스템을 바꾸자 더 이상 눈치 보지 않고 먹고 싶은 만큼 밥을 퍼 담아 갈 수 있어 모두 만족스러워했다.

또 한 번은 하루 종일 먼지를 뒤집어 쓴 직원들이 씻지를 못해 곤혹스러워했다. 나는 공장에 목욕탕을 짓기로 했다. 처음엔 남자목욕탕만 지었는데 여직원들이 찾아와 여자목욕탕도 지어달라고 해서 추가로 한 동을 더 지었다. 직원들 모두 살 것 같다며 너무들 좋아했다.

내가 경영자로 일하던 때를 기억하면 이 두 가지 일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경영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마음으로 기업을 경영하느냐에 따라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경영자의 마음은 순박함이다. 사물과 현상과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순박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 부하직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말을 있는 그대로 믿어주는 겸허한 태도가 필요하다.

상황을 꼬아서 보고, 직원의 말을 의심하고, 전략이라는 미명하에 꼼수를 부리는 것은 경영자의 올바른 자세가 아니다. 경영자가 꼼수를 부리면 직원들도 꼼수를 부리게 마련이다. 사장도 직원도 꼼수를 부리는 기업이 무슨 수로 잘 될 수 있겠는가. 순박한 사장과 순박한 직원이 함께 정직하게 꾸려나가는 기업이 오래도록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

 

◆ 남기동 선생은...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100살이다. 일본 제6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신생 이공학부 응용화학과에 편입했다. 1946년 중앙공업연구소 지질광물연구소장, 요업 과장으로 근무하며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 등에도 출강했다. 부산 피난 중에도 연구하며 공학도들을 가르쳤다. 6·25 후 운크라 건설위원장을 맡아 1957년 연산 20만 톤 규모의 문경시멘트공장을 건설했다. 화학과장, 공업국 기감(技監)으로 인천판유리공장, 충주비료공장 등 공장 건설 및 복구사업을 추진했다. 1960년 국내 대학 최초로 한양대에 요업공학과를 창설하고 학과장을 맡았다. 1962년 쌍용양회로 옮겨 서독 훔볼트의 신기술 ‘SP킬른(Kiln)’ 방식으로 1964년 연산 40만 톤 규모의 영월공장을 준공했는데, 최단 공사기간을 기록해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영월공장 준공으로 우리나라는 시멘트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1968년 건설한 동해공장은 단위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공장 증설을 거듭해 1992년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량은 세계 5위가 되었다. 1978년 동양시멘트로 자리를 옮겨 2차 오일쇼크 때 시멘트 생산 연료를 벙커씨유에서 유연탄으로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 특허 대신 공개를 택해 업계를 위기에서 살려냈다. 이 공적으로 1981년 '3·1 문화상(기술상)'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 요청으로 1992년 인도네시아 최초의 시멘트공장인 '시비뇽 시멘트플랜트(P.T. SEMEN CIBINONG)'를 건설했다. 한국요업(세라믹) 학회, 한국화학공학회, 대한화학회등 3개 학회, 대한요업총협회(지금의 한국세라믹총협회) 회장으로 학계와 산업계의 유대를 다졌다. 학교, 연구소, 산업체가 참석하는 '시멘트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를 조직해 학술교류는 물론 민간교류에도 힘썼다. 세라믹학회는 그의 호를 따 장학지원 프로그램인 '양송 상'을 제정했다. 1993년 인하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2006년 서울대 설립 60돌 기념 '한국을 일으킨 60인' 상, 2007년 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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