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비전e] 나는 노래에 재능이 없다. 재능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음치’ 소리를 들을 정도다. 18번으로 흥얼거리는 노래가 있고, 학창시절에는 우크렐레동아리에서 활동하기도 했지만, 예나 지금이나 노래와 음악에 재능이 없는 것은 확실하다. 100년 동안 못 찾으면 재능이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

나와 달리 엄마를 닮은 큰딸 광순이에게는 음악적 재능이 돋보였다. 여섯 살 때부터 피아노를 가르쳤는데, 너무 어려서인지 싫증을 많이 냈다. 레슨이 얼마나 지루했으면 선생님 몰래 시곗바늘을 앞으로 돌려놓기까지 했을까.

광순이가 사랑방에서 피아노 연습을 할 때면 나는 문밖에 앉아 기다려주곤 했다. 아빠한테 미안해서라도 열심히 연습하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었다. 열네 살 때 KBS교향악단과 협주하고 나서 광순이는 드디어 자기 재능을 발견한 듯했다. 그 후 서울대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국가 대표로 일본에 갔다가 음악도시 오스트리아 빈에서 유학하고 세계무대에서 연주하는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되었다.

자식을 여섯이나 키우고 대학에서 적잖은 제자를 가르치고 연구소와 기업에서 수많은 엔지니어를 훈련하면서 깨달은 것은 누구에게나 재능은 있으며 그것을 찾아내 개발하면 그 분야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의 재능은 공부였다. 어릴 때부터 공부를 아주 잘했다. 타고난 수재였던 쌍둥이 형 덕분에 2등을 할 수밖에 없었던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 이후에는 누구에게도 1등자리를 내준 적이 없었다.

쌍둥이를 떨어뜨려 놓아야 둘 다 1등을 할 수 있다고 판단하신 아버지의 뜻을 따라 들어간 일본인학교인 평양공립중학교(평중)에서 유일한 조선인 학생으로 전교 1등을 놓친 적이 없었다.
그 후 일본 학생들도 들어가기가 하늘의 별 따기보다 힘들다는 일본 제6고등학교에 가서도 역시 유일한 조선학생으로 수석을 차지했다. 그것은 식민지 소년이 그나마 가질 수 있었던 자부심이었다.

공학도로서의 재능도 일찍이 아버지가 발굴해 주셨다. 아버지는 큰아들에게는 의학, 둘째아들에게는 법학, 그리고 셋째아들인 나에게는 공학도가 되라고 하셨다. 나름대로 아들들의 적성을 꿰뚫고 계셨던 것 같다.

경성제대 이공학부 응용화학과에 들어가면서 발현된 나의 공학적 재능은 이후 연구소, 정부, 학계, 산업계에서 이룩한 기적 같은 성과들로 입증되었다고 자부한다.

재능은 종류가 다를 뿐 누구에게나 있다. 아무 재능도 없다고 토로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한 가지라도 재능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재능이 전무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실은 재능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잠재된 재능을 찾지 못했을 뿐이다. 재능이 없음을 탓하지 말고 재능을 찾아내지 못하는 자신을 탓해야 한다.

재능을 발견했다면 다음은 그 재능을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나를 위해 쓸 것인가, 남을 위해 쓸 것인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재능을 나를 위해 써야지, 도대체 누구를 위해 써야 한단 말인가 하고.

“배워서 남 주냐?”고들 하지만 나는 이 질문에 분명하게 “배워서 남 준다”고 대답할 것이다. 재능도 그런 것이어야 한다. 나의 재능, 내가 찾아낸 재능, 내가 갈고 다듬은 재능은 나뿐 아니라 남을 위해, 우리를 위해, 모두를 위해 쓰여야 한다.

자신만을 위해 재능을 쓰는 사람은 재능이 없다고 자책하는 사람이나 재능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사람보다 불행해질 수 있다.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을 얻는 데 재능을 사용하는 사람은 부자가 될 수도 있고, 명예를 얻을 수도 있고, 권력을 잡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오래가지 못하고 결국에는 그것들 때문에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이다.

배우지 못한 사람이 짓는 죄보다 배운 사람이 짓는 죄가 더 크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무수히 찾아볼 수 있다. 재승덕박(才勝德薄). 재주가 지나쳐 덕을 넘어서면 부리는 재주가 되레 이롭지 못하다는 말이다. 재주는 사람을 놀라게는 할 수 있어도 감동을 주진 못한다. 감동을 주는 것은 사랑이다.

재능은 자신의 부귀영화가 아니라 남과 이웃, 사회와 국가, 나아가 세상과 인류를 위해 쓸 때 비로소 가치를 지니게 될 것이고, 그 재능을 가진 사람이야말로 가치 있는 삶을 산 것이리라.

재능을 자신이 아니라 모두를 위해 써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자신의 것으로 알고 있는 그 재능이 실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 재능이 내 것이 아니면 도대체 누구의 것이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모든 재능은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고,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다.

우리는 모두 ‘달란트(talent)’라는 종잣돈(seed money)을 받고 태어난다. 달란트는 ‘타고난 재능’을 뜻하는 ‘탤런트(talent)’의 어원이기도 하다. 어쩌면 우리는 재능이 온전히 나의 것이므로 나를 위해 쓰는 것이 당연하며 재능이 부와 명예, 권력을 가져줄 것이라고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달란트는 ‘하나님이 주신 재능’이다. 그래서 ‘소명’이라는 뜻도 있다. 소명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다. 공부든 노래든, 다른 무엇이든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에 쓸모 있는 달란트를 주셨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쓸모없는 인간을 만들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는 <레 미제라블>에서 성경의 한 구절을 응용해 이렇게 썼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이다.’

누구든 하나님의 얼굴을 보려면 사랑해야 한다. 내가 아닌 남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재능이다. 재능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데 쓰라고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나이를 먹으면 삶을 되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재능을 하나님 뜻대로 쓰려고 했던가?’

‘혹시라도 재능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나의 것인 양 잘난 체 하고, 자만하고, 교만에 빠지지는 않았던가?’

하나님은 자만과 교만에 빠질 때마다 고통을 주신다. 재능을 사랑하는 데 쓰도록 인도하는 것이리라.

나에게 재능이 있음을 알게 된 순간, 그 재능이 세상을 위해 쓸모가 있음을 알게 된 순간부터 그것을 세상을 위해 쓰리라 마음먹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사람들을 사랑하기 위해. 나는 제자들에게도 그것을 가르쳐 주고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재능, 사람을 사랑하기 위한 재능을. 지금까지 인생 여정을 통해 나를 배우게 하신 그 분의 목적대로 온전히 쓰임을 받는 삶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돌이켜보면 소중한 인연들, 만남들 어느 하나 우연이 아니었다. 그것이 좋든 나쁘든 모두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었다.

나는 누구인가? 나의 정체성을 알게 하시는 분은 누구인가. 나는 단순히 엔지니어가 아니라, 누구의 스승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남기동일 뿐이다.

내가 공학도로 재능이 있음을 깨닫고 대학에서 공부를 마쳤을 때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패망하고, 해방 후 다시 6・25가 일어났다. 전쟁의 잿더미밖에 남지 않은 그때 나는 나의 재능을 어디에 써야 할지 통감했다.

산업이라 할 만한 것이 없던 시절, 요업, 그중에서도 시멘트는 건물을 짓고, 다리를 놓고 도로를 닦는 데 가장 효과적인 재료였다. 학창시절 내가 왜 공부에 재능이 있었고, 공학도가 되기로 결심했는지, 공학 중에서도 응용화학, 그중에서도 하필이면 요업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수수께끼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대학에서 요업을 공부한 사람은 사실상 나밖에 없었다. 나는 비로소 나의 재능이 소명임을 깨달았다. 내가 배운 것을 가난하고 상처받은 우리 국민을 위해, 국가를 재건하고 경제를 개발하는 데 모두 쏟아붓겠다고 다짐했다.

그때 만약 모든 리더가 자신을 위해, 돈을 많이 벌기 위해,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 재능을 이용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나라는 아직도 비참한 상황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나의 인생도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재능기부’라는 것도 특별하고 거창한 것이 아니다.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할 일이다. 나와 함께 대한민국 요업을 키워온 사람들은 우리가 연구하고 배운 것을 널리 알리고 후학에게 전수하는 일을 마땅히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누가 시켜서 한 것도 아니고 자랑할 일은 더욱 아니었다.

지난 70년 동안 꾸리고 가꾼 학회와 협회도 그런 재능나눔의 결과로 이루어진 역사다.

재능은 모두에게 쓸모 있을 때 아름다운 것이다. 나에게만 득이 되고 남에게 해가 되는 재능은 아무리 화려해도 추한 것이 되고 만다. 재능은 누구를 위해 쓰느냐에 따라 인생의 성공 비결이 될 수도 있고 실패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자신의 재능이 무엇인지, 소명이 무엇인지 찾아냈다면 소중한 재능을 내가 아닌 세상을 위해 어떻게 가치 있게 쓸 것인지 생각하라. 그것이 바로 성공한 인생이다.

 

◆ 남기동 선생은...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100살이다. 일본 제6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신생 이공학부 응용화학과에 편입했다. 1946년 중앙공업연구소 지질광물연구소장, 요업 과장으로 근무하며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 등에도 출강했다. 부산 피난 중에도 연구하며 공학도들을 가르쳤다. 6·25 후 운크라 건설위원장을 맡아 1957년 연산 20만 톤 규모의 문경시멘트공장을 건설했다. 화학과장, 공업국 기감(技監)으로 인천판유리공장, 충주비료공장 등 공장 건설 및 복구사업을 추진했다. 1960년 국내 대학 최초로 한양대에 요업공학과를 창설하고 학과장을 맡았다. 1962년 쌍용양회로 옮겨 서독 훔볼트의 신기술 ‘SP킬른(Kiln)’ 방식으로 1964년 연산 40만 톤 규모의 영월공장을 준공했는데, 최단 공사기간을 기록해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영월공장 준공으로 우리나라는 시멘트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1968년 건설한 동해공장은 단위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공장 증설을 거듭해 1992년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량은 세계 5위가 되었다. 1978년 동양시멘트로 자리를 옮겨 2차 오일쇼크 때 시멘트 생산 연료를 벙커씨유에서 유연탄으로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 특허 대신 공개를 택해 업계를 위기에서 살려냈다. 이 공적으로 1981년 '3·1 문화상(기술상)'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 요청으로 1992년 인도네시아 최초의 시멘트공장인 '시비뇽 시멘트플랜트(P.T. SEMEN CIBINONG)'를 건설했다. 한국요업(세라믹) 학회, 한국화학공학회, 대한화학회등 3개 학회, 대한요업총협회(지금의 한국세라믹총협회) 회장으로 학계와 산업계의 유대를 다졌다. 학교, 연구소, 산업체가 참석하는 '시멘트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를 조직해 학술교류는 물론 민간교류에도 힘썼다. 세라믹학회는 그의 호를 따 장학지원 프로그램인 '양송 상'을 제정했다. 1993년 인하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2006년 서울대 설립 60돌 기념 '한국을 일으킨 60인' 상, 2007년 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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