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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시멘트산업의 살아있는 역사] 남기동 회고록(16) 100년의 선물

[뉴스비전e] 2006년 12월 5일 ‘한국을 일으킨 엔지니어 60인’ 수상자로 시상식에 참석했다. 수상자 가운데 박태준 회장이 대표로 연설하고 가장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내가 건배사 겸 감사인사를 하게 되었다.

“저는 아직 88세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모두 박장대소했다.

8년 후 학회 기념식에 참석했을 때도 이렇게 건배사를 했다.

“저는 겨우 아흔여섯밖에 안 먹었습니다. 내년에 또 봅시다!”

역시 장내는 웃음바다가 되었다. 여든이 넘은 후배나 제자들도 별로 보이지 않는 것이 안타까운 마음에 다들 힘내서 오래 살자는 바람으로 고안해낸 건배사였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났으니 올해로 ‘백 살밖에’ 안 먹었다. 예로부터 드물다는 고희(古稀)를 맞고도 30년이나 흘러 훨씬 더 드문 나이가 된 것이다.

내가 살아온 100년은 그야말로 격동의 세월이었다.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에 태어나 일제강점기와 태평양전쟁, 해방과 6・25, 재건과 원조경제시대, 4・19와 5・16, 그 후에도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혼란과 변화를 온 몸으로 겪었다.

어떤 이는 나에게 ‘역사의 인생’ 속에서 ‘인생의 역사’를 만들어 왔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시멘트계의 대부’, ‘한국경제를 일으킨 엔지니어’ 같은 영광스런 타이틀을 붙여주기도 했다.

그것은 과찬의 말이다. 나는 그저 나의 주어진 삶을 나름대로 충실하게 살아왔을 뿐이다. 그것은 자랑할 일도, 칭찬받을 일도 아니다.

그런데도 세상사람들은 나에게 묻는다. 격랑의 100년 동안 어떻게 그처럼 순탄하게 웃음을 잃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왔는지를 말이다.

그 사람의 신발을 신고 걸어보지 않고서는 누구도 그 사람에 대해 말할 수 없는 법이다.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것에 진실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순탄하게 보이는 삶의 이면에 가시밭길 같은 고뇌가 있었음을, 웃음으로 승화된 눈물이 있었음을, 건강을 위한 노력이 있었음을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한다.

나는 공학으로 시작해 공학으로 은퇴한 영원한 엔지니어 이자 세라미스트(요업인)가 되길 바란다. 내가 아는 것은 공학이고, 내가 인생을 보는 관점도 공학적일 수밖에 없다.

인생에도 기술(Technology)이 필요하다. 나의 100년 인생을 공학적으로 되돌아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내가 나름 정리해 본 인생에서 필요한 일곱 가지 기술(7T)이 있다. 인생이란 결국 부여받은 재능과 소명(Talent)을 훈련(Training)하고, 진실함(Truth)으로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Trying other’s shoes on)하고, 함께 가치를 만들어가며 그 결과에 감사(Thanks)하는 시간(Time)의 예술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 남기동 선생은...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100살이다. 일본 제6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신생 이공학부 응용화학과에 편입했다. 1946년 중앙공업연구소 지질광물연구소장, 요업 과장으로 근무하며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 등에도 출강했다. 부산 피난 중에도 연구하며 공학도들을 가르쳤다. 6·25 후 운크라 건설위원장을 맡아 1957년 연산 20만 톤 규모의 문경시멘트공장을 건설했다. 화학과장, 공업국 기감(技監)으로 인천판유리공장, 충주비료공장 등 공장 건설 및 복구사업을 추진했다. 1960년 국내 대학 최초로 한양대에 요업공학과를 창설하고 학과장을 맡았다. 1962년 쌍용양회로 옮겨 서독 훔볼트의 신기술 ‘SP킬른(Kiln)’ 방식으로 1964년 연산 40만 톤 규모의 영월공장을 준공했는데, 최단 공사기간을 기록해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영월공장 준공으로 우리나라는 시멘트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1968년 건설한 동해공장은 단위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공장 증설을 거듭해 1992년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량은 세계 5위가 되었다. 1978년 동양시멘트로 자리를 옮겨 2차 오일쇼크 때 시멘트 생산 연료를 벙커씨유에서 유연탄으로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 특허 대신 공개를 택해 업계를 위기에서 살려냈다. 이 공적으로 1981년 '3·1 문화상(기술상)'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 요청으로 1992년 인도네시아 최초의 시멘트공장인 '시비뇽 시멘트플랜트(P.T. SEMEN CIBINONG)'를 건설했다. 한국요업(세라믹) 학회, 한국화학공학회, 대한화학회등 3개 학회, 대한요업총협회(지금의 한국세라믹총협회) 회장으로 학계와 산업계의 유대를 다졌다. 학교, 연구소, 산업체가 참석하는 '시멘트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를 조직해 학술교류는 물론 민간교류에도 힘썼다. 세라믹학회는 그의 호를 따 장학지원 프로그램인 '양송 상'을 제정했다. 1993년 인하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2006년 서울대 설립 60돌 기념 '한국을 일으킨 60인' 상, 2007년 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남기동  news@nv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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