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비전e] 나는 2006년 서울대 설립 60돌을 맞아 서울대 공대가 선정한 ‘한국을 일으킨 60인’ 상을 수상했다.

당시 나는 88세로 수상자 중 최고령이었다. 2007년에는 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을 맞아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나는 국내 시멘트산업 발전을 위해 엔지니어, 교수, CEO로 언제나 최선을 다하며 60년 넘게 한 길만 걸어왔다.

내가 배워서 할 수 있는 일이 가난한 조국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하게 생각했다.

욕심은 없었다. 공직에 있을 때도 높은 자리를 탐하지 않았고, 학계에서도 학생들만 바라보았으며 기업에서도 직원들과 회사를 키우고 기술을 발전시키는 데 올인했다.

시멘트 분야에서 60년 넘게 외길을 걸어올 수 있었던 것은 ‘몰입의 기쁨’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한다.

그것 말고는 어떤 것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요업에 몰입한 것은 나에게 기쁨을 가져다주었고, 성과도 만들어 주었다.

사람들은 행복해지기 위해 열심히 일한다고 하지만, 나는 열심히 일하는 것 자체가 행복이었다.

 

◆ 남기동 선생은...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100살이다. 일본 제6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신생 이공학부 응용화학과에 편입했다. 1946년 중앙공업연구소 지질광물연구소장, 요업 과장으로 근무하며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 등에도 출강했다. 부산 피난 중에도 연구하며 공학도들을 가르쳤다. 6·25 후 운크라 건설위원장을 맡아 1957년 연산 20만 톤 규모의 문경시멘트공장을 건설했다. 화학과장, 공업국 기감(技監)으로 인천판유리공장, 충주비료공장 등 공장 건설 및 복구사업을 추진했다. 1960년 국내 대학 최초로 한양대에 요업공학과를 창설하고 학과장을 맡았다. 1962년 쌍용양회로 옮겨 서독 훔볼트의 신기술 ‘SP킬른(Kiln)’ 방식으로 1964년 연산 40만 톤 규모의 영월공장을 준공했는데, 최단 공사기간을 기록해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영월공장 준공으로 우리나라는 시멘트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1968년 건설한 동해공장은 단위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공장 증설을 거듭해 1992년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량은 세계 5위가 되었다. 1978년 동양시멘트로 자리를 옮겨 2차 오일쇼크 때 시멘트 생산 연료를 벙커씨유에서 유연탄으로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 특허 대신 공개를 택해 업계를 위기에서 살려냈다. 이 공적으로 1981년 '3·1 문화상(기술상)'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 요청으로 1992년 인도네시아 최초의 시멘트공장인 '시비뇽 시멘트플랜트(P.T. SEMEN CIBINONG)'를 건설했다. 한국요업(세라믹) 학회, 한국화학공학회, 대한화학회등 3개 학회, 대한요업총협회(지금의 한국세라믹총협회) 회장으로 학계와 산업계의 유대를 다졌다. 학교, 연구소, 산업체가 참석하는 '시멘트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를 조직해 학술교류는 물론 민간교류에도 힘썼다. 세라믹학회는 그의 호를 따 장학지원 프로그램인 '양송 상'을 제정했다. 1993년 인하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2006년 서울대 설립 60돌 기념 '한국을 일으킨 60인' 상, 2007년 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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