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비전e] 나는 요업계에 투신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요업인(세라미스트)으로 살아왔다.

이론과 실천에 바탕을 둔 기술자로 공업입국 대열에 동참했고 연구와 후학 양성에 심혈을 기울여 왔다.

1960년부터는 한국요업(세라믹)학회 회장(1960~1964), 한국화학공학회 회장(1975~1976), 대한화학회 회장(1977~1978) 등 3개 학회의 회장을 맡았고 대한요업총협회(지금의 한국세라믹총협회) 회장으로 학계와 산업계의 유대를 공고히 다지고자 노력했다.

1962년에는 요업학회장으로서 숙원사업인 요업학회지를 창간(1964년)해 요업인 상호간 기술정보 교류와 연구성과 발표의 장을 마련했다. 쌍용양회, 동양시멘트 등에 재직하는 동안 대학 요업공학도들의 현장실습과 취업에 적극 노력했으며 대학과 기업의 산학공동연구를 위한 연구비 지원에도 힘썼다.

한국요업학회에서 학교, 연구소, 산업체에서의 연구성과를 발표하는 ‘시멘트심포지엄’을 1973년부터 개최해 우리나라 시멘트 기술과 과학의 기초를 다지는 데도 노력했다. 일본 6고 동창들과 쌓은 친분을 바탕으로 1984년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를 조직하고 위원장을 맡았다.

‘미래의 재료’로 각광받고 있는 파인세라믹스(신소재)에 관한 한・일 양국의 세라믹 관련 교수, 학생을 비롯한 전문가들이 만나 연구결과를 발표하고 토론하는 행사를 진행해 학술교류는 물론 민간교류에도 힘썼다.

한국세라믹학회 사무실 구입비의 50퍼센트를 기부하고, 학회 발전기금으로 3억 원을 기부했는데, 학회에서 나의 호를 딴 장학지원 프로그램인 ‘양송상’을 제정해 기금으로 활용하고 있다.

연료대체에 성공하면서 그 공로로 받은 ‘3・1문화상’ 상금 5,000만 원도 학회를 설립하는 데 보탰다. 1993년에는 인하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0년대 우리 요업계는 도자기, 유리, 내화물, 연마재, 시멘트 등 이른바 굴뚝산업인 고전 요업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것이 지난 60년 사이 고전 요업과 신요업(파인 세라믹)이 조화를 이루면서 수입대체산업에서 수출산업으로 발전했다.

오늘날에는 첨단 신소재 개발로 중화학공업에서 전자정보산업에 이르기까지 모든 산업을 뒷받침하는 소재산업으로 발전했다.

1990년대 이후 디스플레이용 면유리의 연구개발은 더욱 활발해져 FED, LED, LCD 등이 등장해 현재 우리나라 디스플레이용 면유리산업은 세계를 선도하고 있다.

우리 요업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최근 십수 년의 성과이지만 그 뿌리는 고려청자, 조선백자의 전통에서 찾을 수 있다. 그 기술이 단절되지 않았다면 우리나라는 이미 오래 전에 요업강국이 되었을 것이다.

대한요업총협회 회장으로 추진한 사업 중 가장 보람을 느끼는 것도 ‘이삼평(李參平)’이라는 도공의 존재를 우리나라에 널리 알린 일이다. 추모식에 참석해 그의 위업을 기리고 도자(陶磁)문화를 통한 한-큐슈 교류 증진을 지원했다.

조선 도공이 일본에서는 ‘도자기의 신(神)’으로 추앙받으며 매년 성대한 축제가 벌어지는데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도공이 있었는지조차 모르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남기동 선생은...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100살이다. 일본 제6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신생 이공학부 응용화학과에 편입했다. 1946년 중앙공업연구소 지질광물연구소장, 요업 과장으로 근무하며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 등에도 출강했다. 부산 피난 중에도 연구하며 공학도들을 가르쳤다. 6·25 후 운크라 건설위원장을 맡아 1957년 연산 20만 톤 규모의 문경시멘트공장을 건설했다. 화학과장, 공업국 기감(技監)으로 인천판유리공장, 충주비료공장 등 공장 건설 및 복구사업을 추진했다. 1960년 국내 대학 최초로 한양대에 요업공학과를 창설하고 학과장을 맡았다. 1962년 쌍용양회로 옮겨 서독 훔볼트의 신기술 ‘SP킬른(Kiln)’ 방식으로 1964년 연산 40만 톤 규모의 영월공장을 준공했는데, 최단 공사기간을 기록해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영월공장 준공으로 우리나라는 시멘트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1968년 건설한 동해공장은 단위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공장 증설을 거듭해 1992년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량은 세계 5위가 되었다. 1978년 동양시멘트로 자리를 옮겨 2차 오일쇼크 때 시멘트 생산 연료를 벙커씨유에서 유연탄으로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 특허 대신 공개를 택해 업계를 위기에서 살려냈다. 이 공적으로 1981년 '3·1 문화상(기술상)'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 요청으로 1992년 인도네시아 최초의 시멘트공장인 '시비뇽 시멘트플랜트(P.T. SEMEN CIBINONG)'를 건설했다. 한국요업(세라믹) 학회, 한국화학공학회, 대한화학회등 3개 학회, 대한요업총협회(지금의 한국세라믹총협회) 회장으로 학계와 산업계의 유대를 다졌다. 학교, 연구소, 산업체가 참석하는 '시멘트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를 조직해 학술교류는 물론 민간교류에도 힘썼다. 세라믹학회는 그의 호를 따 장학지원 프로그램인 '양송 상'을 제정했다. 1993년 인하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2006년 서울대 설립 60돌 기념 '한국을 일으킨 60인' 상, 2007년 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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