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비전e] 국가기간시설 건설이 활발해지면서 시멘트 수요가 급증함에 따라 영월공장의 경험과 기술을 바탕으로 1968년 동해공장을 건설했다.

단위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1, 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에 힘입어 1962~1972년 영월에 1~5호의 시멘트킬른을 건설하고, 1966~1974년 대단위 동해공장(1~3호 킬른)을 건설한 것이다.

두 공장의 생산능력이 4,797,000톤(M/T)에 달해 쌍용은 국내 최대 시멘트 메이커로 부상했다.

이 시기가 내가 축적한 지식과 기술을 마음껏 발휘하며 활약한 시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영월과 동해 두 공장의 기술, 인력 교류를 위한 ‘생산기술협의회’를 구성했다. 쌍용의 기술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1962년부터 네 차례에 걸친 경제개발계획에 따라 시멘트산업은 국가기간산업의 하나로 급속히 발전해왔다.

1964년 쌍용양회가 연산 40만 톤 규모의 현대식 설비를 갖추고 등장하면서 국내 수요를 완전히 충족시키고 2만2,000톤의 시멘트를 수출까지 해서 시멘트 수출국 대열에 오르게 되었다.

1974년 우리나라의 연간 시멘트 생산 능력은 9,914,000톤(M/T)에 달하게 되었다.

동해공장은 처음 200만 톤 규모로 출발했으나 증설을 거듭해 1993년에는 연간 생산량이 1,000만 톤 규모로 단일 공장으로는 세계 최대가 되었다.

1992년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량은 세계 5위로 연산 6,000만 톤 규모로 커졌다. 1인당 연산 1톤을 뛰어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었다. 품질도 다른 나라에 앞서게 되었다.

한국은 시멘트 전량 수입국에서 십수 년 만에 시멘트 강대국으로 성장했다. 과감한 도전은 국내 시멘트산업의 발전은 물론 경제발전의 토대를 마련했다.

 

◆ 남기동 선생은...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100살이다. 일본 제6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신생 이공학부 응용화학과에 편입했다. 1946년 중앙공업연구소 지질광물연구소장, 요업 과장으로 근무하며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 등에도 출강했다. 부산 피난 중에도 연구하며 공학도들을 가르쳤다. 6·25 후 운크라 건설위원장을 맡아 1957년 연산 20만 톤 규모의 문경시멘트공장을 건설했다. 화학과장, 공업국 기감(技監)으로 인천판유리공장, 충주비료공장 등 공장 건설 및 복구사업을 추진했다. 1960년 국내 대학 최초로 한양대에 요업공학과를 창설하고 학과장을 맡았다. 1962년 쌍용양회로 옮겨 서독 훔볼트의 신기술 ‘SP킬른(Kiln)’ 방식으로 1964년 연산 40만 톤 규모의 영월공장을 준공했는데, 최단 공사기간을 기록해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영월공장 준공으로 우리나라는 시멘트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1968년 건설한 동해공장은 단위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공장 증설을 거듭해 1992년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량은 세계 5위가 되었다. 1978년 동양시멘트로 자리를 옮겨 2차 오일쇼크 때 시멘트 생산 연료를 벙커씨유에서 유연탄으로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 특허 대신 공개를 택해 업계를 위기에서 살려냈다. 이 공적으로 1981년 '3·1 문화상(기술상)'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 요청으로 1992년 인도네시아 최초의 시멘트공장인 '시비뇽 시멘트플랜트(P.T. SEMEN CIBINONG)'를 건설했다. 한국요업(세라믹) 학회, 한국화학공학회, 대한화학회등 3개 학회, 대한요업총협회(지금의 한국세라믹총협회) 회장으로 학계와 산업계의 유대를 다졌다. 학교, 연구소, 산업체가 참석하는 '시멘트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를 조직해 학술교류는 물론 민간교류에도 힘썼다. 세라믹학회는 그의 호를 따 장학지원 프로그램인 '양송 상'을 제정했다. 1993년 인하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2006년 서울대 설립 60돌 기념 '한국을 일으킨 60인' 상, 2007년 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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