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비전e] 나는 문경공장 건설을 끝으로 후학 양성에 전념하려고 했지만 정부에서 놓아주질 않았다.

1956년 화학과장(지금의 서기관급)에 임명되었고, 3년 후 공업국 기감(技監)을 맡았다.

미국 국제협력부(ICA, 현 국제개발처) 원조, 각종 공장 건설 및 복구사업을 추진했다. 하나하나가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긴요한 프로젝트였다.

충주비료공장 역시 상공부 시절 만든 작품이다.

1962년 충주비료공장이 가동되기 전까지 매년 원조자금 2억 5,000만 달러 중 1억 달러를 비료 도입에 써야 했다. 빈곤 퇴치를 위해 농업에 사용할 화학비료의 자급이 절실했다.

1959년 충북 충주 목행동에 요소비료공장을 건설했다. 이것을 바탕으로 내가 상공부를 떠난 뒤인 1961년에는 충주암모니아센터(제6비료공장)가 연산 23만1,000톤 규모로 확정되어 자급자족과 수출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지금은 ‘한국판유리’가 된 인천판유리공장도 그때 지은 것이다.

1957년 준공된 후 나는 남해 쪽에 하나를 더 건설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최적의 부지를 찾아 제2판유리공장 건설을 추진했으나 정치적 이해관계에 부닥쳐 무산되고 말았다.

비료, 판유리, 시멘트, 철강 등 주요 기간산업의 건설은 1960년대 이후 본격화된 대한민국 경제개발의 토대가 되었다.

 

◆ 남기동 선생은...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100살이다. 일본 제6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신생 이공학부 응용화학과에 편입했다. 1946년 중앙공업연구소 지질광물연구소장, 요업 과장으로 근무하며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 등에도 출강했다. 부산 피난 중에도 연구하며 공학도들을 가르쳤다. 6·25 후 운크라 건설위원장을 맡아 1957년 연산 20만 톤 규모의 문경시멘트공장을 건설했다. 화학과장, 공업국 기감(技監)으로 인천판유리공장, 충주비료공장 등 공장 건설 및 복구사업을 추진했다. 1960년 국내 대학 최초로 한양대에 요업공학과를 창설하고 학과장을 맡았다. 1962년 쌍용양회로 옮겨 서독 훔볼트의 신기술 ‘SP킬른(Kiln)’ 방식으로 1964년 연산 40만 톤 규모의 영월공장을 준공했는데, 최단 공사기간을 기록해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영월공장 준공으로 우리나라는 시멘트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1968년 건설한 동해공장은 단위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공장 증설을 거듭해 1992년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량은 세계 5위가 되었다. 1978년 동양시멘트로 자리를 옮겨 2차 오일쇼크 때 시멘트 생산 연료를 벙커씨유에서 유연탄으로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 특허 대신 공개를 택해 업계를 위기에서 살려냈다. 이 공적으로 1981년 '3·1 문화상(기술상)'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 요청으로 1992년 인도네시아 최초의 시멘트공장인 '시비뇽 시멘트플랜트(P.T. SEMEN CIBINONG)'를 건설했다. 한국요업(세라믹) 학회, 한국화학공학회, 대한화학회등 3개 학회, 대한요업총협회(지금의 한국세라믹총협회) 회장으로 학계와 산업계의 유대를 다졌다. 학교, 연구소, 산업체가 참석하는 '시멘트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를 조직해 학술교류는 물론 민간교류에도 힘썼다. 세라믹학회는 그의 호를 따 장학지원 프로그램인 '양송 상'을 제정했다. 1993년 인하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2006년 서울대 설립 60돌 기념 '한국을 일으킨 60인' 상, 2007년 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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