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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시멘트산업의 살아있는 역사] 남기동 회고록⑤ 덴마크 연수

[뉴스비전e] 폐허가 된 산하를 복구하기 위해서는 건설자재를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가장 시급한 것이 시멘트였다. 잿더미로 뒤덮인 땅 위에 집을 짓고 도로를 닦고 다리를 놓으려면 시멘트가 있어야 했다.

당시 우리나라 시멘트공업은 형편없었다. 해방 당시 38선 이남의 유일한 시멘트공장은 오노다삼척공장이었다. 여기서 나오는 시멘트로는 급증하는 전후 복구와 재건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다.

미군이 본국이나 독일, 일본 등지로부터 시멘트를 구입해 제공했는데 아무리 공짜라도 자금을 대는 지원 당국 입장에서는 운송비가 시멘트 값보다 비싸 배보다 배꼽이 큰 형국이었다.

물류시스템도 열악해 해외에서 들여온 시멘트가 부산항에 도착해 하역하는 과정에서 포대가 터지는 등 손실이 많았다. 무상지원도 언제 끊어질지 몰랐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했다.

정부는 “우리나라에 규석, 점토, 석고 같은 시멘트 원료는 풍부하니 시멘트 제조공장을 세워 달라”고 운크라에 요청했다. 고기를 잡아주지 말고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한 것이다.

운크라가 공장을 지어줄 업체를 선정하기 위해 국제입찰에 붙인 결과, ‘스미스(FLSmidth)’라는 덴마크 회사가 낙찰되었다.

다음 문제는 시멘트공장을 어디에 짓느냐 하는 것이었다. 경북 문경과 충북 단양이 적당하다는 결론이 나왔는데, 두 지역 정치인들 사이에 유치경쟁이 치열했다. 가난한 시골에 대단위 공장이 들어서는 것 자체가 엄청난 혜택이었다.

석회석 질은 단양이 다소 나았지만, ‘휴전선에서 한 발짝이라도 먼 곳으로 해야 한다’는 이유로 문경으로 확정되었다.

전쟁으로 산업시설이 파괴되면 얼마나 고통을 받게 되는지 절감하던 시절이었다.

건설 준비 과정에서도 난관에 부닥쳤다. 건설위원장인 내가 시멘트 플랜트에 문외한이니 실력을 쌓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덴마크 스미스 본사로 연수를 떠났다. 스미스의 숙련된 엔지니어들에게 맡길 수도 있었지만, 나도 어엿한 공학도 출신의 엔지니어인 만큼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실습하고 연구해야 제2, 제3의 공장을 지을 때 내 손으로, 우리 기술로 완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덴마크로 날아가 스미스 본사와 공장에서 장장 7개월 동안 내게 남은 학구열을 모두 쏟아부었다. 내가 얼마나 많이 제대로 배워 가느냐에 우리나라 시멘트공장 건설의 성패가 달렸다고 생각하니 잠시도 쉴 수 없었다.

 

◆ 남기동 선생은...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100살이다. 일본 제6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신생 이공학부 응용화학과에 편입했다. 1946년 중앙공업연구소 지질광물연구소장, 요업 과장으로 근무하며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 등에도 출강했다. 부산 피난 중에도 연구하며 공학도들을 가르쳤다. 6·25 후 운크라 건설위원장을 맡아 1957년 연산 20만 톤 규모의 문경시멘트공장을 건설했다. 화학과장, 공업국 기감(技監)으로 인천판유리공장, 충주비료공장 등 공장 건설 및 복구사업을 추진했다. 1960년 국내 대학 최초로 한양대에 요업공학과를 창설하고 학과장을 맡았다. 1962년 쌍용양회로 옮겨 서독 훔볼트의 신기술 ‘SP킬른(Kiln)’ 방식으로 1964년 연산 40만 톤 규모의 영월공장을 준공했는데, 최단 공사기간을 기록해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영월공장 준공으로 우리나라는 시멘트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1968년 건설한 동해공장은 단위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공장 증설을 거듭해 1992년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량은 세계 5위가 되었다. 1978년 동양시멘트로 자리를 옮겨 2차 오일쇼크 때 시멘트 생산 연료를 벙커씨유에서 유연탄으로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 특허 대신 공개를 택해 업계를 위기에서 살려냈다. 이 공적으로 1981년 '3·1 문화상(기술상)'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 요청으로 1992년 인도네시아 최초의 시멘트공장인 '시비뇽 시멘트플랜트(P.T. SEMEN CIBINONG)'를 건설했다. 한국요업(세라믹) 학회, 한국화학공학회, 대한화학회등 3개 학회, 대한요업총협회(지금의 한국세라믹총협회) 회장으로 학계와 산업계의 유대를 다졌다. 학교, 연구소, 산업체가 참석하는 '시멘트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를 조직해 학술교류는 물론 민간교류에도 힘썼다. 세라믹학회는 그의 호를 따 장학지원 프로그램인 '양송 상'을 제정했다. 1993년 인하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2006년 서울대 설립 60돌 기념 '한국을 일으킨 60인' 상, 2007년 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남기동  news@nv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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