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비전e] 요업 중에서도 시멘트에 관심을 가지고 전문성을 키워가던 1950년 전쟁이 발발했다.

부산 피난 중에도 업체로부터 실험실을 빌려 연구하면서 피난 온 공학도들도 가르쳤다.

휴전협상이 이루어진 1953년 피난생활을 끝내고 서울로 올라왔을 때 중앙공업연구소는 폐허가 된 상태였다.

동료들과 함께 요업과와 무기화학과를 재건하는 데 전력을 쏟았다.

3년 전쟁은 민족을 남북으로 갈라놓은 채 끝났다.

나 역시 부모님과 생이별을 해야 했다.

전쟁은 모든 것을 파괴했다.

남산에 올라가 내려다보니 성한 건물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사실상 황무지였다.

산업시설 복구가 시급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대한민국을 재건하기 위해 결성된 운크라(UNKRA, 유엔한국재건위원단)는 세 가지 산업재에 주목했다.

비료, 시멘트, 유리였다. 농사를 지어 먹고살아야 하니까 비료가 필요하고, 파괴된 건물과 도로, 다리를 재건해야 하니 시멘트가 필요하고, 창문에 들어갈 유리가 필요했다.

충주비료공장, 문경시멘트공장, 인천판유리공장은 그렇게 탄생했다. 그 세 공장을 짓기 위한 건설위원회 위원장을 내가 맡게 되었다.

 

◆ 남기동 선생은...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100살이다. 일본 제6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신생 이공학부 응용화학과에 편입했다. 1946년 중앙공업연구소 지질광물연구소장, 요업 과장으로 근무하며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 등에도 출강했다. 부산 피난 중에도 연구하며 공학도들을 가르쳤다. 6·25 후 운크라 건설위원장을 맡아 1957년 연산 20만 톤 규모의 문경시멘트공장을 건설했다. 화학과장, 공업국 기감(技監)으로 인천판유리공장, 충주비료공장 등 공장 건설 및 복구사업을 추진했다. 1960년 국내 대학 최초로 한양대에 요업공학과를 창설하고 학과장을 맡았다. 1962년 쌍용양회로 옮겨 서독 훔볼트의 신기술 ‘SP킬른(Kiln)’ 방식으로 1964년 연산 40만 톤 규모의 영월공장을 준공했는데, 최단 공사기간을 기록해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영월공장 준공으로 우리나라는 시멘트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1968년 건설한 동해공장은 단위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공장 증설을 거듭해 1992년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량은 세계 5위가 되었다. 1978년 동양시멘트로 자리를 옮겨 2차 오일쇼크 때 시멘트 생산 연료를 벙커씨유에서 유연탄으로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 특허 대신 공개를 택해 업계를 위기에서 살려냈다. 이 공적으로 1981년 '3·1 문화상(기술상)'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 요청으로 1992년 인도네시아 최초의 시멘트공장인 '시비뇽 시멘트플랜트(P.T. SEMEN CIBINONG)'를 건설했다. 한국요업(세라믹) 학회, 한국화학공학회, 대한화학회등 3개 학회, 대한요업총협회(지금의 한국세라믹총협회) 회장으로 학계와 산업계의 유대를 다졌다. 학교, 연구소, 산업체가 참석하는 '시멘트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를 조직해 학술교류는 물론 민간교류에도 힘썼다. 세라믹학회는 그의 호를 따 장학지원 프로그램인 '양송 상'을 제정했다. 1993년 인하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2006년 서울대 설립 60돌 기념 '한국을 일으킨 60인' 상, 2007년 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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