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비전e] 소싯적 꿈은 교수였지만 나는 학교에 남을 수가 없었다. 독립된 나라에서 할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1946년 중앙공업연구소에 들어갔다. 해방된 조국에서 내가 배운 것을 펼칠 기회가 생긴 것은 축복이었다.

중앙공업연구소는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메카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중앙공업연구소도 상공부 산하로 개편되면서 체계를 갖추어 나갔다.

나는 지질광물연구소장을 거쳐 전공과 밀접한 요업과를 맡아 대한민국 요업의 기반을 닦는 데 혼신의 힘을 쏟았다.

공업시험을 하면서 기술을 지도하고 기술자를 양성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연구소 뒤에 있던 도자기 가마에서 젊은 인재들을 위한 실습 과정을 만들어 가르쳤고, 전국에 분포된 요업자원을 탐사해 표본을 만들기도 했다.

당시 대한민국이 처한 현실은 참혹했다. 1인당 국민소득 35달러, 문맹률 78퍼센트, 고등교육을 받은 인재가 2만6,000명에 불과한 최빈국이었다.

인재가 턱없이 부족했다. 후학 양성을 위한 나의 열정을 불태우기에 중앙공업연구소는 너무 좁았다.

그래서 교수진이 부족한 모교 서울대 공대를 비롯해 고려대, 한양대 등에 틈틈이 출강해 후진을 양성하는 데 힘을 보탰다.

해방은 되었지만 아무것도 없는 조국에서 배우고 가르치는 것이 가장 확실한 투자라고 생각했다.

 

◆ 남기동 선생은...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100살이다. 일본 제6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신생 이공학부 응용화학과에 편입했다. 1946년 중앙공업연구소 지질광물연구소장, 요업 과장으로 근무하며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 등에도 출강했다. 부산 피난 중에도 연구하며 공학도들을 가르쳤다. 6·25 후 운크라 건설위원장을 맡아 1957년 연산 20만 톤 규모의 문경시멘트공장을 건설했다. 화학과장, 공업국 기감(技監)으로 인천판유리공장, 충주비료공장 등 공장 건설 및 복구사업을 추진했다. 1960년 국내 대학 최초로 한양대에 요업공학과를 창설하고 학과장을 맡았다. 1962년 쌍용양회로 옮겨 서독 훔볼트의 신기술 ‘SP킬른(Kiln)’ 방식으로 1964년 연산 40만 톤 규모의 영월공장을 준공했는데, 최단 공사기간을 기록해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영월공장 준공으로 우리나라는 시멘트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1968년 건설한 동해공장은 단위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공장 증설을 거듭해 1992년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량은 세계 5위가 되었다. 1978년 동양시멘트로 자리를 옮겨 2차 오일쇼크 때 시멘트 생산 연료를 벙커씨유에서 유연탄으로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 특허 대신 공개를 택해 업계를 위기에서 살려냈다. 이 공적으로 1981년 '3·1 문화상(기술상)'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 요청으로 1992년 인도네시아 최초의 시멘트공장인 '시비뇽 시멘트플랜트(P.T. SEMEN CIBINONG)'를 건설했다. 한국요업(세라믹) 학회, 한국화학공학회, 대한화학회등 3개 학회, 대한요업총협회(지금의 한국세라믹총협회) 회장으로 학계와 산업계의 유대를 다졌다. 학교, 연구소, 산업체가 참석하는 '시멘트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를 조직해 학술교류는 물론 민간교류에도 힘썼다. 세라믹학회는 그의 호를 따 장학지원 프로그램인 '양송 상'을 제정했다. 1993년 인하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2006년 서울대 설립 60돌 기념 '한국을 일으킨 60인' 상, 2007년 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저작권자 © 뉴스비전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