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biz&cul
[대한민국 시멘트산업의 살아있는 역사] 남기동 회고록① Prologue"아직 100살밖에 안 먹었습니다만"

[뉴스비전e 3·1운동 100주년 특집시리즈] 2017년 봄, 둘째며늘아기가 잠실 롯데월드타워를 구경시켜주었다. 아주 오랜만의 나들이였다.

121층 360도 전망대에서 수많은 아파트와 빌딩, 그리고 강남과 강북을 연결하는 20개가 넘는 대교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시력이 많이 떨어져 현기증이 났지만 가슴만큼은 뭉클했다.

‘저 모든 것이 시멘트와 철로 지어졌으리라.’

지난 60년 동안 상전벽해를 이룬 ‘한강의 기적’에 나의 수고도 한몫 들어 있다는 사실에 보람과 감사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나라마다 시멘트공장을 처음 건설한 연도를 보면, 영국 1825년, 프랑스 1846년, 독일 1855년, 미국 1871년, 일본 1873년 등이다. 한국은 1919년 일본 오노다(小野田)시멘트에 의해 건설된 평양공장이 처음이다. ‘1919년’ ‘평양’에서 내가 태어난 것은 우연일까? 운명일까?

나는 올해로 100살이 되었다. 이 땅에서 장장 1세기를 살아온 것이다. 그 오랜 시간이 엊그제처럼 생생한 것은 나의 삶이, 내가 흘린 땀과 눈물이 격동과 굴곡의 대한민국 현대사와 맞물려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 남기동 선생은...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100살이다. 일본 제6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신생 이공학부 응용화학과에 편입했다. 1946년 중앙공업연구소 지질광물연구소장, 요업 과장으로 근무하며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 등에도 출강했다. 부산 피난 중에도 연구하며 공학도들을 가르쳤다. 6·25 후 운크라 건설위원장을 맡아 1957년 연산 20만 톤 규모의 문경시멘트공장을 건설했다. 화학과장, 공업국 기감(技監)으로 인천판유리공장, 충주비료공장 등 공장 건설 및 복구사업을 추진했다. 1960년 국내 대학 최초로 한양대에 요업공학과를 창설하고 학과장을 맡았다. 1962년 쌍용양회로 옮겨 서독 훔볼트의 신기술 ‘SP킬른(Kiln)’ 방식으로 1964년 연산 40만 톤 규모의 영월공장을 준공했는데, 최단 공사기간을 기록해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영월공장 준공으로 우리나라는 시멘트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1968년 건설한 동해공장은 단위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공장 증설을 거듭해 1992년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량은 세계 5위가 되었다. 1978년 동양시멘트로 자리를 옮겨 2차 오일쇼크 때 시멘트 생산 연료를 벙커씨유에서 유연탄으로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 특허 대신 공개를 택해 업계를 위기에서 살려냈다. 이 공적으로 1981년 '3·1 문화상(기술상)'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 요청으로 1992년 인도네시아 최초의 시멘트공장인 '시비뇽 시멘트플랜트(P.T. SEMEN CIBINONG)'를 건설했다. 한국요업(세라믹) 학회, 한국화학공학회, 대한화학회등 3개 학회, 대한요업총협회(지금의 한국세라믹총협회) 회장으로 학계와 산업계의 유대를 다졌다. 학교, 연구소, 산업체가 참석하는 '시멘트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를 조직해 학술교류는 물론 민간교류에도 힘썼다. 세라믹학회는 그의 호를 따 장학지원 프로그램인 '양송 상'을 제정했다. 1993년 인하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2006년 서울대 설립 60돌 기념 '한국을 일으킨 60인' 상, 2007년 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남기동  news@nvp.co.kr

<저작권자 © 뉴스비전e,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남기동의 다른기사 보기
icon관련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