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광모 LG 회장은 40세에 재계 4위 그룹의 총수가 되었다는 사실만로도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10대 그룹 총수 가운데 가장 나이가 적다. 젊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이는 많든 적든 숫자에 불과하다. 하지만 같은 숫자라도 실수(實數)와 허수(虛數)가 있다.

13년 동안 경영수업을 받았다지만, 정작 수업 내용을 들여다보면 눈에 띄는 것이 없다. 힘든 부서에서 중책을 맡았다거나 공을 세우지는 않았다 해도 열정이나 의지를 엿볼 만한 에피소드 한 편이 없다. 오히려 안전하고 편안한 곳에서 승진만 거듭한 모양새다.

 

LG전자 대리점집 아들?

구 회장은 재수를 해서 가까스로 한양대에 합격하지만 돌연 미국행을 결정한다. 재벌가 자녀들이 대체로 그렇듯 국내 대학에서 평범한 교우관계를 유지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다닌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구 회장의 내성적인 성격으로는 세간의 관심을 감당하기가 더 힘들었을 것이다. 

중고등학교 시절 구 회장은 자신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부잣집 아들 티를 전혀 내지 않아 친한 친구들조차 그를 ‘LG전자 대리점집 아들’쯤으로 알고 있었다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대학에서는 더 이상 신분을 감출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한양대에 합격하자마자 미국으로 간 것도 그래서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구 회장은 로체스터공대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했다.

 

사랑꾼의 돌파력

유학 중 인연을 맺게 된 사람이 지금의 아내 정효정 씨다. 정 씨는 중소기업 ‘보락’의 창업 2세인 정기련 대표의 장녀다. 정씨도 연애 초기에는 구 회장의 집안이 LG와 관계된 사업을 하는 정도로 생각했다고 한다. 역시 구 회장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중에 그가 LG그룹의 사실상 후계자임을 알게 되어 큰 부담이 되었을 테지만 사랑은 이미 깊어져 있었다.

5년 가까이 연애하다 2009년 화촉을 밝히기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보락은 1959년 창업한 전통 있고 탄탄한 기업이긴 했지만, LG가(家)와 사돈을 맺기에는 부담이 컸다. LG가의 혼맥에서는 아주 이례적인 케이스였다.

양가의 반대는 만만치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구본무 회장의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동생의 아들을 양자로까지 들여 후계자로 삼고자 한 구본무 회장으로서는 ‘기울어도 한참 기운’ 혼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들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결혼에 골인하자 당시 호사가들은 구광모 회장에게 ‘사랑꾼’이란 별명을 붙여주었다. 결혼호재로 이름도 생소했던 ‘보락’의 주가도 1주일 만에 두 배로 뛰었다.

 

무슨 일을 언제 얼마나?

구 회장이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 승낙을 받아내기까지 ‘사랑경영’에 힘을 쏟는 동안 정작 후계자로서의 경영수업은 소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시 미국 유학시절로 돌아가 보자. 로체스터공대를 졸업한 구 회장은 국내 IT솔루션업체에서 산업기능요원으로 군복무를 대신했다.

2006년 9월 LG전자 재경부문 금융팀 대리로 입사하면서 후계자의 경영수업이 시작되는 듯했다. 공학도를 금융팀에 배치한 것은 그렇다 해도 입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이듬해 다시 미국으로 건너간 것이 부자연스럽다. 입사 6개월 만에 대리에서 과장으로 승진만 하고서 업무를 중단한 셈이다.

미국 스탠퍼드대 MBA(경영학 석사) 과정을 밟기 위해서였다는데, MBA가 필요했다면 왜 굳이 입사를 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아마도 그 시기가 정 씨와의 교제문제로 집안 어른들과의 갈등이 고조된 때가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MBA도 과정만 수료하고 학위는 취득하지 못했다는 얘기도 있다. 수료든 졸업이든, 도중에 그만두었든 한국으로 들어와 본사로 복귀하지 않고 실리콘밸리에서 스타트업을 시도했다는 것도 석연치 않은 대목이다. LG그룹의 후계자가 스타트업에 뛰어들었다는 것도 이례적이지만 어떤 벤처를 만들었는지, 성공은 했는지 실패했는지조차 알려진 바가 없다.

 

함량보다 속도

구 회장이 LG전자에 복귀한 것은 2009년 8월이다. 하지만 국내 본사가 아니라 홈엔터테인먼트(HE) 사업본부 뉴저지법인이었다. 2년도 되지 않아 차장으로 승진 발령을 받으며 뉴저지법인에서 총 5년 가까이 근무했다.

2014년에야 국내로 들어오자마자 본사 HE사업본부 TV선행상품 기획팀 부장으로 승진하고, 4월 ㈜LG 시너지팀에 합류했다. 2015년 임원 승진을 시도해 상무가 되었다.

입사 후 10년 만에 대리에서 상무로 초고속 승진을 한 것은 다른 그룹의 2, 3세 승진 속도에 비해 빠르다고 할 수는 없다.

문제는 속도가 아니라 ‘함량’이다. 시작과 끝만 보면 햇수로 10년이지만, MBA 과정을 밟고 이후 스타트업에 참여한 시간을 빼면 실제로 근무한 기간은 채 6년이 안 된다. 그것도 대부분의 시간을 국내 본사가 아닌 미국법인에서 보냈다. 현지에서 실무를 경험했을지는 몰라도 경영수업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은 아니라고 봐야 한다.

임원이 된 이후에도 지난 3년 동안 이렇다할 역할을 했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는다.

 

안전한 수업

선대 회장이 건재했다면 구 회장에게는 그룹 지휘부서에서 충분히 경영수업을 받을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구 회장은 경영을위한 준비가 너무 늦었고, 선대 회장은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났다.

구본무 회장은 아들을 애지중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생전 화초라면 이끼까지 사랑했던 구본무 회장은 어쩌면 아들도 화초처럼 키우고 싶었던 것일까. 후계자에게는 어려운 일을 맡기지 않는 것이 그룹 총수들의 원칙이기는 하다. 어려운 일을 맡아 눈에 띄는 성과를 만들어내는 것은 모험이다. 

성과를 내면 다행이지만, 실패하면 자리에 오르기도 전에 경영능력이 부족하다는평가를 받게 된다. 모험보다는 안전하고 무난하게 가는 것이 상책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칭찬을 받는 것보다 비난을 면하는 것이 낫다고 보는 것이다. 

금융팀은 실적과는 무관한 지원부서이고, HE사업본부는 LG전자의 주력부문으로 해마다 목표실적을 경신해 왔으며, 더구나 미국법인이라면 누가 가더라도 부담 없이 근무할 수 있는 곳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들까

LG가의 ‘장자승계’ 원칙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구 회장을 회장 자리에 올려놓은 원칙이 초단위로 급변하는 무한경쟁시대에도 통할 수 있을지는 오로지 구 회장 자신에게 달려 있다.

업계에서는 앞으로 상당기간 구 회장이 그룹 경영 전면에 나서지는 않을 것으로 점치고 있다. 경영수업이 한참 필요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그룹 회장 자리는 수업을 받는 자리가 아니라 주주와 직원, 고객에 대한 책임의식을 가지고 기업의 목표를 향해 질주하는 말 위의 안장 같은 것이다.

구 회장은 어쩌면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에 기대를 걸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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